- 기상하자마자 시계를 확인. 8시 반이군. 30분 정도 더 누워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고 음악을 듣다가 창문 열어 환기하고 이불 개고 걸레질한 뒤, 아침 먹고 세수하고 향후의 집중력을 위해 티비를 끈 뒤 커피 올려놓고 뛰어가서 과자를 사왔다(...) 커피를 다 내리고 티테이블을 완성하여 거실 소파에 착석한 시간은 11시 10분 전. 다시 TV를 켰다. 

 

- 재판관들이 등장하고 한차례의 플래시 세례가 지나간 뒤 선고가 시작되었다. 블랙리스트와 세월호 쟁점은 탄핵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해석에 감정적으로는 화가 났지만 법리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한다면 그럴 수 도 있겠지... 그래도 역시 찜찜했다.

 

- 이러다가 설마 기각 되는거 아냐? 하는 불안이 싹틀 때 쯤, 흐름이 바뀌었다.  경어로 진행되던 판결이 주문에 이르러 평어로 전환되던 그 순간!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주문이 선고되어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지만 이내 우와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래는 생중계로 공개된 선고문의 후반부. 헌법수호의지 부족(이라고 쓰고 태도 불량이라고 읽는다)을 지적하는 부분도 너무 통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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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살펴본 피청구인의 법위반 행위가 피청구인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여야 함은 물론, 공무 수행은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청구인은 최서원의 국정개입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그에 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회 등 헌법기관에 의한 견제나 언론에 의한 감시 장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피청구인은 미르와 케이스포츠 설립, 플레이그라운드와 더블루케이 및 케이디코퍼레이션 지원 등과 같은 최서원의 사익 추구에 관여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배행위는 재임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국회와 언론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를 단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피청구인의 지시에 따른 안종범, 김종, 정호성 등이 부패범죄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중대한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것입니다.

 

한편, 피청구인은 대국민 담화에서 진상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였습니다.

 

이 사건 소추사유와 관련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수호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 결정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하여 피청구인은 생명권 보호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지만, 헌법상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고, 다만 그러한 사유만으로는 파면 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재판관 안창호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선고를 모두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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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순간, 핸드폰으로 포털 화면을 캡처해보았다. 으히히. 프로필이 엄청나게 빨리 업데이트 되었다. 

 

 

   

 

 

 

 

- 세월호를 둘러싼 쟁점과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동시에 고려한 흔적이 돋보이는 보충의견도 좋다. 4.16 연대의 논평과 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의 보충 의견을 읽는데 눈물이 났다. 논평대로, 재판관들의 보충의견대로 이 비극을 치유하는 일은 새로운 질서가 도래한 지금부터 진짜 시작일 것이다. 유가족들과 우리 사회의 상처가 조금쯤은 아물기 시작할 그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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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연대 논평] 세월호 7시간 제외시킨 것은 상식 밖

 

헌재의 탄핵인용은 당연한 결정이다. 온 국민의 마음속에서 이미 박근혜는 탄핵당하여 대통령의 자격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재가 박근혜의 세월호참사 당일의 직무유기를 탄핵사유로 인용하지 않은 것은 상식 밖의 일로서 매우 유감스럽다.

 

헌재는 대통령이 당일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는지 여부가 탄핵심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청와대가 당일 행적에 대한 기록과 정보를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특검 등이 당일 행적 수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헌재가 대통령이 관저에 머물렀다는 사실확인만으로 탄핵근거로 삼기는 쉽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로써 모든 불법적 편법적 권력수단을 동원해서 진실을 가려온 박근혜의 권한남용이 특조위 조사도 특검수사도 헌재 탄핵심판도 모면하는데 통했다는, 법치의 관점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선례가 남겨지게 되었다. 세월호 특조위 조사가 방해받지 않았다면, 특검수사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헌재의 판결에 다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터이다.

 

헌재의 판단이 세월호참사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와 수사를 회피하거나 위축시키는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헌재의 결정과정은 진실규명과 진실을 감추기 위한 온갖 불법행위에 대한 온당한 처벌과 심판의 중요성을 더욱 선명히 보여준다.

 

더불어 이번 헌재의 판단을 계기로 헌법상 대통령의 국민생명권 보호 의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국민의 권리도 보다 실질적인 의무와 권리로 해석되고, 조문상으로도 보완되어야 할 필요성이 확인되었다. 이제 우리는 국민생명권이 헌법상의 권리로도 구체화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제 진짜 진상규명의 시작이다. 우리는 위헌세력의 진실은폐 장막을 걷어내서 세월호참사 이후는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는 전 국민적 염원을 실현해 낼 것이다.

 

 

-------

 

세월호 참사 관련 소추사유에 관한 보충의견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

 

(...)

 

○ 국가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상황을 지휘하는 것은 실질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효과도 갖는다. 실질적으로는, 경찰력, 행정력, 군사력 등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적으로 발휘할 수 있어 구조 및 수습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척될 수 있다. 상징적으로는,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재난 상황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구조 작업자들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할 수 있고, 피해자나 그 가족들에게 구조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며,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위로를 받고 재난을 딛고 일어설 힘을 갖게 한다.

 

진정한 국가 지도자는 국가위기의 순간에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고 피해자 및 그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국민에게 어둠이 걷힐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지도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국가위기가 발생하여 그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이를 통제, 관리해야 할 국가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 4. 16.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피청구인은 그날 저녁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집무실에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머물렀다. 그 결과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형 재난이 발생하였는데도 그 심각성을 아주 뒤늦게 알았고 이를 안 뒤에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급박한 위험이 초래된 국가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음에도, 그에 대한 피청구인의 대응은 지나치게 불성실하였다. 그렇다면 피청구인은 헌법 제69조 및 국가공무원법 제56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한다.

 

(...)

 

국가 최고지도자가 국가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하여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므로 피청구인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위반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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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의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이정미 재판관은 퇴임 전 마지막 업무가 탄핵 판결이었네. 대국민 PT라고 해야하나, 클라이언트한테 프로젝트 최종 보고를 멋지게 하고 퇴장하는 셈이다. 그 분은 업무 인수인계서 같은건 안쓰겠지... 여튼 막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단정한 용모를 유지해야 하는 일하는 여성의 이중고를 보여준 두 개의 헤어롤, 잊지 못할거에요. 귀여우면서도 멋졌어요 정말. 해학의 민족들에게 신나는 짤 재료를 던져준 것도 고맙습니다...

 

- 현재 나의 고민. 치킨도 먹고 드라마 본방도 보고(이제훈!) 수영도 가고 특집 토론도 봐야하는데, 이 넷 중에 무얼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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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불붙었던 촛불이 이제는 거의 다 태워진 것 같다. 

그렇게 기다리던 탄핵 심판 최종 판결. 올것 같지 않던 그 날이 드디어 오는구나.


2014년 4월 16일이 기억난다.

오전에 전원구조되었다는 뉴스를 보았고, 그날 따라 일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허둥지둥 5시 반 수업에 갔더니 도대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던 교수님의 우울한 토로를 듣고나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으니까. 손바닥만한 핸드폰으로 도저히 믿겨지지 않은 뉴스들을 읽으며  얼이 빠진채로 11시쯤 집에 도착했다. 거실 티비에는 시커먼 바닷물과 반쯤 잠긴 배가 나오고 있었고, 그제서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떡해 어떡해만 울먹이며 뉴스를 보다 잠이 들었고, 이틀 뒤에는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기울며 불이 천천히 꺼지는 가운데 벽에 붙어있던 손잡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꿈을 꿨었다.


2016년 12월 9일.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는 강연을 듣고 있었고,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는 소식이 알림으로 떴다. 옆자리 친구에게 화면을 보여주면서 우와! 하고 웃었었지.


3월 10일 금요일 11시. 어디서 어떻게 소식을 맞이해야 할까. 


그간 미약하게나마 함성을 보태기 위해 몇 차례 들렸던 광장의 사진을 본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 날. 아무생각 없이 걷다보면 맨 앞에 가게 된다더니 꼭 그렇게 됐다. 내자동 로터리의 차벽을 앞에 두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11월 19일. 처음으로 꽃 스티커가 등장한 날. 스티커는 사실 별 생각없이 받았는데, 

나중에 이걸 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분이 미묘해졌다. 

행진을 막아서는 거대한 벽 앞에서도 우리는 "민폐조차 끼치지 않는 평화시민"이 되어야 하는걸까.  




12월 3일. 내 기억이 맞다면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개소리에 반발한 횃불(!)이 이 때 처음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이런 멋진 대응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활동가들의 노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감사했던 날. (이거 따라다녔더니 좀 덜 추웠어요...) 

국회의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있었던 때였던지라 다른 때보다 훨씬 비장하고 서슬퍼런 결의가 말그대로 공기에서부터 느껴졌다

뜨거운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로 간신히 누르고 있던 이날의 광장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송박영신의 구호가 울려퍼진 날, 또 혼참러로서 조금 외로웠던 날. 

뭣보다 이날은 정말정말 추웠다. 꼬박 두 시간 반을 밖에 있었더니 몸이 녹는데 그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는.

결국 1, 2월 집회는 시내 나간김에 두어번 서성대는 수준에 그쳤다. 





3월 4일 집회. 탄핵 선고 전 마지막 집회가 될 것 같아서 저조한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으로 기어나갔다.

비록 행진할 때까지 버티기엔 몸이 안 따라줄 것 같아서 그냥 광장 주변에서 파노라마를 몇 장 찍고,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왔지만. 

봄을 예감케 하는 날씨 덕분이었을까, 이 고생도 슬슬 끝나간다는 기대감 덕분일까,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들의 온갖 추잡스런 방해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긴 겨울을 버텨내준 시민들의 인내와 위엄이 꼭 빛을 보기를.

"When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미셸 오바마의 어록은 광장을 지키고 채워준 시민들을 위한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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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4 금요일. 영화보고 이리저리 신나게 메모했는데 실수로 삭제해버려서 대충 쓰는 후기. 


- 컨택트. 조디 포스터가 나온 옛날 영화가 재개봉한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영화 스틸컷을 보고 꽂혔다. (조디 포스터의 영화는 ""택트라더라...) , 이건 극장에서 봐야하는 영화구나 하고. 드넓은 평원의 광활함을 압도하는 우주선의 존재감. 거기다가 모양은 어떻고. 스티브 잡스가 자기 가운데에다가 모셔두었을 같은 스타일이다.




- 영화는 <트리 오브 라이프> 같기도 하고 <그래비티> 같기도 하다가 <괴물> 같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후반부에서 주인공 루이스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전반부의 무게감과 정교함에 비해 성기다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영화의 소위 "반전" 영화의 내러티브 규칙과 결합되어 있어서 좋았다. 


- 결과적으론 최근에 영화들 중에서는 여운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영화다. 음악/사운드와 영화의 전반적인 미감이 묘하게 결합되면서 관객의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리는 방식을 좋아하는데. 특히나 처음으로 우주선(?) 진입하던 순간, 영화 인물들은 중력이 약해지면서 두둥실 뜨는 것과 반대로 사운드는 중량감 있게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짓누르던 때의 몰입감이 대단했다. 왠지 어깨가 아픈것 같고, 씩씩대는 숨소리조차 죽이게 되는, iptv 감상으로는 절대 느끼지 못하는 현장감. 지금도 OST 듣고 있는데 발밑으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오는 같고 그렇다. 




- 한국 포스터... 구리다. 90년대 느낌이 물씬한 문제가 아니라( 물론 그것도 문제인듯..) 영화 후반부의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디자인. <인터스텔라> 스멜... 거기다가 "어라이벌" 그렇게 어려운 제목도 아닌데 "컨택트" 이름을 바꿨을까? 나처럼 조디 포스터 영화로 착각한 사람들을 노린건가? 아니면 외계인과의 "조우" 중심이 되는, 이미 익숙한 플롯의 SF 작품을 포지셔닝하기 위한 마케팅적 판단인가? 어쨌든 오른쪽 버전이 훨씬 간결하고, 영화의 동력이 되는 질문을 명쾌하게 내세운다는 점에서 좋다. "Why are they here?" 영화는 결국 "What is your purpose on earth?"라는 질문의 답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세계관을 전달하기 위한거니까. 도착(Arrival) 출발(Departure), 닫힘과 열림, 현재와 미래가 맞물려 도는 이야기는 마치 헵타포드들의 문자처럼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없는 원형의 이야기가 된다.



    



- 영화는 대략 이렇게 요약될 있을 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과 다른 언어 체계를 갖는 헵타포드들의 언어, 시제도 문장의 시작도 끝도 없는 완결된 원의 형태로 형상화 되는 언어를 배움으로써 선형적 시간이 지배하는 언어 질서의 틀을 벗어날 있다. 비선형적 언어와 사유의 자유를 얻게 , 그래서 미래의 일까지 있게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 루이스는 딸에게 말한다. "It's unstoppable." 그래도 멈출 없는 .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슬픔, 불행, 절망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하는 사랑의 기쁨, 행복, 환희를 껴안으려고 하는 루이스의 겸허한 강인함. 그리고 굳건한 다짐에 기반하여 피어나는 소통가능성에 대한 믿음. 믿음은 결국 세계마저 구원한다. 


- 이 믿음을 나이브하다고 있겠지만, 그래도 대책없는 무조건적인 낙관이 아니라는 점이 영화의 진짜 매력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루이스가 외계인과 소통에 성공하는 장면은 곱씹을 수록 재밌다. human이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방호복을 벗어던지는 그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얼굴을 선명히 드러낸 채 헵타포드의 몸인 촉수(?) 투명한 벽을 가운데 두고 처음으로컨택트하는 순간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걸음의 전진. 시간의 선형성이 해체되어 하나의 원처럼 통합된 헵타포드의 언어 다가가는 순간에도 모든 존재는 (루이스도, 헵타포드도) 여전히 그들의 몸에, 탄생과 죽음, 삶의 시작과 끝을 잇는 선형적 시간의 진행에서 결코 빠져나올 없는 물질적(corporeal) 몸에 매여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 또 구원하는 것은 결국 헵타포드의 언어가 아니라(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방문은 일방적 선물이 아닌 미래의 호혜를 위한 초석이다)  극복할 없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의지이다. 영화의 가장 극적인 장치가죽음 이유도 아마 이와 관련있지 않을까. 작품에서죽는인물들, 희귀병에 스러진 루이스의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하는 유언을 남긴 중국 장군의 부인, 심지어 군인들의 공격에 희생당한 헵타포드 마리(?) 존재는 모두 역설을 보여준다. 누구도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몸은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굴복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남긴 흔적은 원형의 언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남은 이들의 삶과 기억에 함께 한다




에이미 아담스가 아닌 다른 배우가 루이스 역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아예 불가능하다. 비루한 말로는 표현이 도저히 불가한 그 섬세함. 바람에 휘날리는 잔머리 한 올, 푸석한 피부 각질 한 톨 모두 그녀가 연기하는 루이스의 아우라에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 눈빛. 유약해보이면서도 미세한 동요의 한 꺼풀 뒤에 자리잡고 있는 끝모를 단단함. 배고픈 맹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결국 그를 돌려세우는 토끼나 사슴 같달까. 어째서 아카데미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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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사라져가는 불빛 창밖에 피어나는 저 불빛 짧아서 슬픈 오늘밤, 안녕 あなたが話した生きる意味 아나타가 하나시타 이키루 이미 あなたが教えた私の意味 아나타가 오시에타 와타시노 이미 (당신이 말해준 내 길의 의미 당신이 알게해준 나의 의미) 
 あなたにささやいて 아나타니 사사야이테 心で伝えます 코코로데 츠타에마스 (당신에게 속삭여 마음으로 말해요) 
 輝く光 카가야쿠 히카리 消えゆく光 키에유쿠 히카리 (빛나는 불빛 사라지는 불빛) 
 あなたも憶えていて 아나타모 오보에테-이테 いつか消えるとしても 이츠카 키에루토 시테모 (당신도 나를 기억해 언젠가 사라진다 해도) 안녕




이민휘의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음반상> 수상을 축하하며 포스팅. (이랑도! 박재범도! 모두 싸랑해요)

수상작인 <빌린 입> EP도 좋지만 그녀가 작업했다는 이 OST도 참 좋다.

먼데서 들려오는 저 아스라한 불꽃 소리. 오스스 소름이 돋는 서늘한 여름밤을 꿈꾸게 하는 음악의 질감.

정작 영화는 아직 못 봤는데, 날씨가 더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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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 각자의 손에 각자의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이제 어두운 실내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의자를 찾아서 두리번 거리지.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고.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어둠 속에서 사건들은 빛나고. 얼굴의 그늘을 밝히고. 우리가 잊힌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팝콘 한 움큼 쥐려다 서로의 팝콘 통을 잘못 뒤적거리고. 손이 엇갈릴 수도 있겠지. 영화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채. 깊이 없는 어둠으로부터.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 한 손에 빈 콜라병을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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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뒤 환해지는 조명. 저 앞 스크린에 가닿던 빛과 그림자가 모두 걷히고 난 뒤 남는 것은 오직 텅 빈 극장. 너와 나는 서로를 모른채, 각자의 연인도 없이 그 내부를 홀로 바라본다. 두리번거리며, 눈을 깜빡이며, 빈 콜라병이 손에 쥐어져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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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월요일 오후 두시 십분. 


집에서 출발한 직후, 오후 일정 취소를 알리는 문자를 받고 갑자기 붕 떠버린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하다가 이왕 시내 나오는 김에 영화나 보자고 결심. <퍼스널 쇼퍼>나 <컨택트> 중 하나를 보고 싶었으나 시간과 동선이 다 애매했고,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과 배우진에 미셸 윌리엄스가 있길래 검색 시작 전까진 이름도 모르던 이 영화로 결정. 심지어 난 맨체스터도 지성팍의 그 맨체스터인줄 알았지 뭐야… 쨌든 보스턴에 사는 남자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라는 줄거리를 보고 가뜩이나 오늘 날씨도 추운데 뉴잉글랜드에서 찍은 영화라니, 생각만해도 더 춥다 하면서 상영관으로 입장. 


영화에서 좋았던 점.


- 플롯은 섬세했고,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영화의 초반부는, 끝나고 곱씹어 보니 이후의 전개를 세련되게 암시했었네. 예를 들면 이런거. 영화가 시작하면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그리고 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배 한 척을 본다. 삼촌 리는 조카 패트릭과 갑판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며, 그의 형이자 패트릭의 아빠 조는 배를 몰고 있다. 삼촌은 조카에게 묻는다. 니가 무인도에 간다면 아빠랑 나 중에 누구를 고를거야? 라는 질문을 한다. 조카는 아빠를 택하고, 삼촌은 조카의 대답이 서운한듯 다시 생각해보라며 장난을 건다. 리는 살갑고 정다운 삼촌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런데 이 질문은 이후 영화에서 리가 겪어야 할 상황으로, 즉 심장병을 앓던 조가 사망하면서 아직 미성년자인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리를 지정한 상황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리는, 무인도에 같이 가자고 할만큼 사랑하던 조카 패트릭을 맡는 일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왜? 도대체 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기실 영화의 흐름은 이와 같은 과거의 리와 현재의 리를 오가며 그의 과거와 내면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 바다 위에서 세 남자의 즐거운 시간을 보여주던 영화는 갑자기 보스턴에서 잡역부 생활을 하고 있는 리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세입자들의 온갖 불편을 처리하는 리의 단조롭고 고된 일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중 첫번째는 계속 새는 꼭지를 고쳐달라는 한 노인의 요구이다. 그는 열번을 고쳤는데도 계속 물이 샌다고 하며, 이에 리는 마개가 물을 제대로 stop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대꾸하며 마개를 갈든지 아니면 전체를 갈든지 알아서 택하라는 식의 미적지근한 답을 한다. 노인은 리에게 좀더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할 수 없냐고 역정을 내는데, 이 에피소드는 실상 맨체스터로 돌아간 이후 드러나게 되는 리의 과거를 은유한다. 아무리 고쳐도 결코 고쳐지지 않고 계속 물이 새는 파이프처럼, 그의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 영화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과거의 리와 현재의 리는 얼마나 다른 인물인가. 리를 연기한 케이시 에플렉의 갈곳없는 눈빛과 터덜거리는 걸음,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아이러니가 자아내는 마르고 쓴 웃음의 순간들이 의외로 인상적이고, 생각보다 꽤 깊숙한 곳을 찌른다. 예를 들면, 땅이 얼어서 형을 바로 묻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럭저럭 아버지의 죽음을 잘 견뎌내고 있는것처럼 보이던 패트릭이 냉동닭을 보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작은 유머도 매우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파이프를 고쳐달라는 노인 다음에는 가족 행사에 참석하는게 귀찮다며 불만 섞인 전화를 하는 할머니가 나오는데(이 때 리는 그녀 옆에서 전등을 갈고 있다), 이 때 그 할머니는 I could slit my throat이라고 말한다. 그 장면에서는 노인네 말 참 터프하게 하네 하면서 피식 웃었는데, 이후 리가 폭발하는 대목, 그러니까 권총으로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발버둥을 치는 장면에서 할머니의 그 무심한 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 영화는 결국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린다는게, 과거가 치유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리의 비극적인 과거는 생각보다 일찍 밝혀지는데, 이후 영화가 진행되면서 나는 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건가? 하고 생각했다. 아마 리 스스로도 조금은 그럴 수 있다, 그러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관객이 그렇게 착각할만한 상황 상의 변화를 몇 가지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배의 처분 문제가 그렇다. 영화의 남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던 그 배를 패트릭은 계속 갖고 싶어하지만, 그는 commercial vessel을 소유할 수 도 운전할 수도 없는 미성년인데다 리는 유지비에 모터 교체비를 감당할 수 없다며 배를 팔아야 한다고 갈등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가도 엑스 와이프인 랜디와의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사소한 실수가 그를 다시 주저앉힌다. 깜빡하고 올려둔 소스가 다 타버려 집안에 연기가 자욱해지자, 등장하는 환영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치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회복이란, 구원이란 얼마나 요원한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는 성급함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장면이 나온 뒤에야 리는 패트릭과 자신의 거취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방법을, 형 친구 데이빗의 도움을 빌려 마련해낸다. 자신이 이곳의 기억을 버텨낼 수 없음을 온전히 깨달은 것이다. 

 

- 리가 소중하게 보관하는 액자 세 개에는 과연 누구의 얼굴이 들어있을까. 어쨌든 이 액자를 발견한 뒤 패트릭은 "I can’t beat it"이라고 말하는 삼촌, 도저히 맨체스터에 살 수는 없다고 고개를 떨구는 삼촌을 비난하는 대신 그를 껴안고 위로해준다. 


- 미셸 윌리엄스는 그야말로 어메이징이다. 영화 시작하고도 한참을 안나오길래, 도대체 언제 나오는거야 하며 기다렸고, 그녀가 연기하는 랜디가 등장하는 시간은 뜻밖으로 작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건 역시 리와 마주친 그녀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폭풍처럼 미안함과 회한과 고통과 슬픔을 토해내는 랜디 앞에서 새카맣게 타버린 리의 심리적 황량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랜디를 두고, 바닥을 쳐다보면서 “There’s nothing there” 라는 말만 반복하는 리. 액션과 리액션의 완벽한 조응을 보았다. 미셸 윌리엄스는 정말 딱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리를 위한 이 영화의 supporting role을 완벽하게 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영화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몇몇 지점에서는 꽤 훌륭하다고 할 만한 순간들도 있다. (패트릭과 리가 다투는 장면들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의 상처난 manhood를 반추하는 멜로드라마”라는 이야기의 태생적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이 한계에 대한 나의 의심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모습을 드러내는 매우 작은,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상한 디테일에 의해 강화되었다. 


- 바다에서 시작한 영화는 바다에서 끝난다. 영화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면, 언 땅이 녹아서 형을 드디어 매장하고, 배의 모터 문제를 해결한 패트릭과 리가 어린 시절처럼 바다에서 웃으며 낚시를 하는 엔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엔딩이 과연 리에게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하는가? 바다는 어디까지나 도피처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제목을 떠올려보자. 여기서 중심은 바다가 아니라 맨체스터이다. 추위를 걷어갈 7월의 여름이 올 때 패트릭을 데이빗에게 맡기고 맨체스터를 다시 떠날 리의 미래가 암시하듯, 리는 영화의 제목과는 달리 맨체스터 대신 그 주변부인 바다에 머무르는데서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manhood의 추락과 훼손을 영원히 절망하는 이야기, 결국 백인 남성인 감독 케네스 로너건이 백인 남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로 보인다. (덧붙이자면, 뉴잉글랜드, 바다, 배, 그리고 육지를 떠나려는 남자의 조합은 <모비딕>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설정이다. 집에 와서 모비딕의 시작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난 바다로 가야해! 라고 외치는 이쉬마엘의 이 구구절절한 심경고백이라니. “Whenever I find myself growing grim about the mouth; whenever it is a damp, drizzly November in my soul; (…) that it requires a strong moral principle to prevent me from deliberately stepping into the street, and methodically knocking people’s hats off — then, I account it high time to get to sea as soon as I can. This is my substitute for pistol and ball.” 이 정도면 이쉬마엘과 영화 속 리의 상황을 구분하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 아닌가.)


- 나아가 재미있는 건, 이 도피처에 이들을 머무르게 해주는 배, 오래된 모터 때문에 팔아치워야할지 말아야 할지로 리와 패트릭의 갈등을 부추겼던 그 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국 지켜내는 이 배의 이름이다. 뱃머리에 큼직하게 써진 채,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서 두 번 보여지는 이 배의 이름은 Claudia Marie인데, 이 이름은 알고보니 형 조를 묻고 난 뒤 챈들러 가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 앞의 비석을 훑을 때 아주 잠깐 지나가는, 조와 리의 어머니 이름이다. 


-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 중 하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 누구의 아버지 등 부계의 관계를 통해 인물들이 소개되거나 언급되는 말들이다. ("저 사람은 리 챈들러에요. 패트릭의 삼촌이죠." "얘는 조 챈들러의 동생이야!" "자네가 그렇다면 xxx 챈들러의 아들인가?") 이러한 말들은 변변한 장의사도 없을만큼 작고, 그래서 누구나 누구를 알고 있는 곳으로 설정된 맨체스터의 지역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 세계에서 이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여성의 존재, 보다 정확히는 이 부계적 질서의 부속품인 엄마 혹은 부인의 존재는 남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들 별로인 인물로 그려진다. 패트릭의 엄마는 알콜 중독자였고, 랜디는, 복잡한 맥락을 단순화 시켜서 말하자면, 똑같이 상처입고 절망한 리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다가 자기 혼자만 새출발한 캐릭터이다. 이들은 남자들의 고단함과 남자들의 즐거움과 남자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가 겪은 끔찍한 사건도 따져보면, 리와 그의 친구들의 파티를 강제로 해산시킨 랜디의 잔소리에서 출발한다. Henpecking wife! 리는 랜디 때문에 깨진 흥을 혼자서라도 즐겨보겠다고 벽난로에 불을 켜고 맥주를 사러 나가는 거고. 다시 거리에서 마주쳤을때조차 리의 입장에서 보면 랜디는 헤어지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상처난 데를 후벼파고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이를 거칠게 종합하자면, 이 세계에서 좋은 여성, 혹은 무해한 여성은 죽은 여성이라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남성들의 유대에서 긍정되는 유일한 여성은 이미 비석에 그 이름이 새겨진, 배로 물화된 클로디아 마리라는 점에서 다시 확인된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소위 이 “선한”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의 주인이 영화 속에서는 단 한번도 제대로 등장하기는 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와 리 형제의 아버지도 영화 초반에는 등장하는데!) 다시 말해, 그녀의 이름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사내들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배의 이름으로만 영화 속 세계에서 그 효용가치와 자리를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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