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토요일 세시 사십분.
- 상영관에 입장할 때 직원들이 비닐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포스터를 나눠주고 있었다. (영화 수입사 측에서 특별히 진행한 이벤트라고.) 처치 곤란하니 안 받아야지 하고 있었는데 앞에 먼저 가던 J가 그냥 두 장을 다 받았다. 자리에 앉고 포스터를 대충 말아 가방에 넣으며 이런거 방 벽에 붙여본지 십년도 더 된거 같아, 라고 하는 순간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 영화가 시작하는 방식. 자신의 구역을 점검 나온 마약 판매상 후안의 시점을 따라 카메라는 커트 없이 주변을 훑는다. 마약을 팔고 사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빙글빙글 돌며 스케치하고, 긴 호흡의 이 장면은 후안의 앞을 뛰어가는 작고 마른 아이, 그리고 그를 쫓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비추는데까지 이어진다. 약간 기울어있는 오후의 햇빛, 층고가 낮은 남루한 집들과 오래된 자동차들이 띄엄띄엄 늘어선 길, 그 곳에 모여있는 중독자와 판매자와 관리자, 그들 간에 오가는 슬랭과 웅얼거림이 섞인 말들, 그리고 화면 한 쪽에서 다급히 뛰어와 다시 반대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아이와 아이들. 이 오프닝은 나른함과 긴장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영화속 세계로 보는 이를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라서 그런지, 마치 Act가 나눠진것처럼 영화는 주인공 샤이론의 이야기를 세 파트로 나눈다. 그리고 이 파트는 각각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이름을 갖는데 이는 어린이, 청소년, 성년시기를 거치는 샤이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각각 소년, 퀴어, 흑인이라는 세 축을 영화와 인물의 중심에 심는다. 왜소한 아이로서 리틀의 시기를 보내는 샤이론은 부재하는 아버지와 마약 문제를 겪는 어머니 대신 유사부모가 되어주는 후안과 테레사의 다정함을 통해 생존한다. (후안의 등장이 1부에 한정되어 있는 것도 그 이유 아닐까.) faggot이 뭐냐고, 또 자신이 게이인지를 어떻게 아냐고 묻던 아이는 2부가 되면 어느새 팔다리만 기다랗게 자란 깡마른 틴에이저가 되어있다. 여전히 그는 어린 시절처럼 괴롭힘을 당하고 엄마의 마약 중독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있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서서히 깨닫는다.
- 사실 3부가 시작되면서 나는 약간 당황했는데, 그 이유는 샤이론이 1, 2부 시절의 호리호리함을 뒤로하고 멧돼지도 때려잡을 것 같은 근육질 남성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 샤이론은 놀라운 연기로 아이 샤이론의 얼굴을 불러낸다!) 이처럼 리틀과 블랙 간에는 외양이 크게 달라질만큼이나 긴 시간이 놓여있지만, 영화는 그 시간을 다시 되돌려 수평선 위에 뜬 달빛과 바다를 마주서고 푸르게 빛나는 어린 샤이론의 뒤돌아보는 얼굴로 돌아가 엔딩을 맺는다. 고개를 돌려 마치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 같은 이 때의 샤이론은 그전까지 영화에서 보여줬던 어떤 얼굴보다 가장 힘있는 눈빛을 전달하는데, 이 때 이 응시와 엔딩에 서려있는 힘은 앞서 언급한 도입부의 독특한 카메라 워크를 포함하여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리듬 혹은 각도가 만들어낸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운 섬세함의 축적에 기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서사적으로 가장 도드라지는 전환점이자 미학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2부, 밤의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케빈과 샤이론이 대화를 나누다 서로를 만지게 되는 신이다. 이 신에서 카메라는 내내 묘한 각도와 신중한 거리감을 체현한다. 옆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소년들의 얼굴은 정면 혹은 옆모습의 숏을 교차시키면서 보여지는 대신 약간 떨어진 대각선 방향에서 차분한 호흡으로 담긴다. 이러한 각도는 서로의 호기로움을 내세우다가 뺨에 스치는 바람의 촉감, 그리고 그 촉감이 불러일으키는 슬픔과 외로움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소년들의 내밀한 대화에 조용히 관객의 자리를 마련한다. 나아가 이 정갈한 "비스듬함"은 이어지는 키스와 터치의 뒷모습을 담아내는 화면에서 이어진다. 옆으로 맞닿아있는 깡마른 등줄기, 떨리는 몸을 버티고 있는 기다란 팔, 뾰족하게 치솟은 어깨는 서로를 마주보지 않은 채 소극적으로 얽혀있는 케빈과 샤이론을 비추는 화면에 선과 모서리들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이렇게 인물들 간의 시선, 또 관객이 인물들을 바라보는 화면을 엄정하게 통제하고 절제하는 방식으로 마지막 장면의 응집력을 쌓아올린다.
- 한편 영화 엔딩에서의 인상적인 응시는 영화 내내 다른 인물들과 눈을 좀처럼 마주치지 않는 샤이론이 스크린 밖 관객의 눈과 적극적으로 마주하는 유일한 순간이자, 전형적인 "성장" 서사에 편리하게 기대지 않는 영화의 미덕을 함께 드러낸다. 샤이론은 워낙에 내성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영화 또한 턱을 떨어뜨리지 않는 그의 얼굴을 좀처럼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체로 긴 속눈썹을 무겁게 내리깔고 있는 그의 눈을 관객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장면은 그가 거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때 정도로 한정된다. 먹을 때도 걸을 때도 늘 구부정한 어깨에 푹 수그린 고개, 한 번에 두 세마디 이상을 좀처럼 내뱉지 않는 과묵한 그. 그런 샤이론에게 있어 케빈은 잔디밭, 학교 비상 계단, 그리고 밤바다에 홀로 떨어져나온 그의 뒤에서 불쑥 나타나 말을 거는 존재이다. 따라서 샤이론이 케빈을 먼저 발견하는 행위,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하는 고갯짓은 그가 퀴어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온전한 자기 인정과 고백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예비한다. 애틀란타에서 고향 마이애미로 돌아가 케빈이 일하는 식당에 들어간 샤이론은 바에 앉아서 자신의 등뒤에서 손님들 사이를 오가는 케빈의 움직임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테이블만큼의 간격 그리고 와인의 알딸딸함을 빌려 마주앉은 케빈과 점차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케빈의 집에 이른 샤이론은 십여년 전 그들이 함께 호흡했던 바람과 파도소리를 느끼고, 마침내 "나를 만져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라는 말을 토해낸다. 자신을 만져주고 또 자신이 만졌던 단 한사람을 마주한 채 영화의 마지막 말을 내뱉는 샤이론의 이 모습이 울컥한 이유는 이 순간을 위해 샤이론이 돌아와야 했던 길이 그만큼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케빈에 대한 사랑의 고백보다는, 단 한번 뿐이었던 최초의 몸짓이 그 바닷가에 정말로 있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의 절박한 혼잣말에 가깝다. 무엇이 될지, 자신의 정체는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후안의 조언이 리틀이 블랙이 될만큼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샤이론은 그제서야 눈을 내리깔던 어린 소년의 그림자를 벗고 그를 억압하던 세상의 시선 또 관객의 눈을 바라보는 존재로 자라게 된다.
- 책상 앞 창문에 극장에서 받은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나는 어제 저녁 책상에 앉아 영화에 대해 멍하니 곱씹다가 실은 포스터 속 얼굴이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얼굴을 한데 모아둔 것임을 알아채고 그 간결하고 아름다운 아트웍에 감탄했다. (그 전까지는 얼굴을 가르는 세 가지 빛깔이 그저 인스타 프렌들리하게 덧댄 디자인이겠거니 했었다...) 그리고 이 감상문은 사실 그 세 얼굴을 한참동안 발견하지 못한 나의 둔감함을 조금이나마 정당화하고 싶어서 쓰여졌다. 영화의 마지막 눈빛에 취해서 코 위의 상처와 수염난 강인한 턱을 보지 못한거라는 변명. 그에게 가해진 의미없는 폭력과 부당한 고통의 증거,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감추고자 하는 시도들은 이제 세상을 마주보는 샤이론의 크고 아름답고 슬픈 눈, 그리고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검은 피부의 존재감에 가리워진다.
*세 배우의 다른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한 인물임을 납득하게 만드는 이 눈빛! 감독의 연기 디렉팅이 대단하니까 가능했겠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소동 덕분에 좀 찝찝하기는 하지만, 트럼프 시대를 막 열어제낀 이 시점에서 이 영화가 작품상을 탄 것 또한 여러모로 재밌는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할리우드의 선전포고라고 해야할까. 선빵을 치기에는 영화가 다소 유순한 정조를 띄고 있다는게 아쉽지만 어쨌든 이 영화의 선전 덕분에 이런 신선한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힘과 지지를 받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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