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9 일요일.
- 인스타에 그런 계정이 있다. 뉴욕 거리에서 지나가는 남녀를 붙잡고 Are you guys a couple?하고 묻는. 어떻게 만났냐는 후속 질문이 나오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어떤 아시안 커플이 나오는 릴스를 H가 공유해주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악세사리와 옷차림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도 정기적으로 손질받는 것이 300% 확실한 헤어를 하고 있었으며, 99%의 대답을 여자가 했다. 보통은 인터뷰이가 처음 만난 이야기를 마치면, 진행자의 다음 질문은 상대방에 대해서 가장 좋아하는 점이 뭐냐는 것인데, 이 컨텐츠에서는 뜬금없이 In-Yun이 뭔지 아냐는 질문이 나왔다. 여자는 Of course, I am Korean 하면서 또 대답을 술술. 갑자기 이 질문은 뭐지? "이거 너무 광고 느낌나는데?"하고 답을 하는 찰나 J의 인스타에 #pastlives라는 캡션이 달린 게시물이 올라왔다. "J야, past lives 이거 밈이야? 비슷한 컨텐츠가 갑자기 많이 보여" "아, 이거 영화에요!" 그렇구나. 찾아보니 코리안아메리칸 여성 감독의 영화다. A24가 제작했고 유태오가 나온다네? 마침 동네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H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거 인연 어쩌구 하는거 past lives라는 영화에서 나오는거 같아. 찾아보니까 동네에서 상영하는데 주말에 보러갈래?"
- 점심부터 몰아치던 비바람이 집을 나서기 직전 말끔하게 잦아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고 극장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리기 직전 다시 시작된 비와 바람의 콜라보. 우산으로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에서 딱 서른 걸음 정도를 걷고나니 온몸이 다 젖었다. 으슬으슬 떨며 축축한 채로 극장에 입장.
- 서로에게 어린 시절의 스윗하트였던 노라와 해성이 노라의 이민으로 헤어졌다가 성인이 되어 재회한다는 큰 틀에 따라 영화는 흘러간다. 피날레에서도 극적이고 열정적인 재결합의 카타르시스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잔잔하고 소박한 종결을 내놓는다. 사실 이 둘의 재회는 근본적으로 닝닝한 탄산수 같을 수 밖에 없는게 태평양을 사이에 둔 각자의 다른 시공간이 결국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어린 시절 공유한 추억으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두 인물의 재회가 일어나는 물적 조건과도 그대로 일치하며, 따라서 첫번째 reconnect는 온라인, 두번째이자 최종적인 물리적 재회가 일어날 때 쯤에 노라는 이미 기혼이 된다.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은 했으나, 딱히 감정적으로 감흥이 일어나거나 영화의 중심인 노라 캐릭터에 몰입이 되지 않았는데, 그건 이 영화가 애초에 타겟하고 있는 사람이 나처럼 이주의 경험 없이 성장과정을 거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유태오 캐릭터가 그나마 나와 비슷할텐데, 어쨌든 영화는 노라를 제외한 캐릭터를 거의 빌드업하지 않는다) 노라와 태성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초반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읭? 하는 질문이 떠다녔는데, 한국 나이로 열두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남녀 아이들이 저렇게 순수하고 솔직하게 교류한다고? 아닌가 예전에는 저랬나? 낭만화되다 못해 거의 sterilized 된, 비현실적 묘사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20대 이후에 노라의 삶이 흘러가는 부분부터는 그냥 감독 자신의 삶을 가져다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부분이 묘하게 걸리적거렸다. 예술가를 꿈꾸는 동아시아 이민 1.5세대 여성으로서 감독이 밟아왔던 인생의 궤적이 예측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으로 간명하게 훑어지는데, 이 "훑어지는" 내용과 방식을 자꾸 곱씹게 되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노라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거치는 고민이나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으며, 이러한 부분을 보여주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떻게 보면 완전히 성장한 노라라는 인물의 설정값을 보여주고 거기까지 이야기를 전진시키는데에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포커스는 어디에 가 닿아있는지를 다시 질문하게 되고... "인연" 그걸 그리기 위한거야?) Playwright이 되고 싶다는 꿈에 따라 뉴욕으로 이주하고, 특정한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고, 그 과정에서 만난 동료 남성(미국인이고 백인이다)과 결혼하고... 노라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은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혹은 검증된(tried-and-true) 과정들을 차례로 밟아나가는(아직도 가장 whitish한 예술창작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코 연극계일 것이다), 주변부 출신의 마이너리티 여성이 내릴 법한 삶의 결정들에 대한 보편화된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기대고 있는 이같은 자전성과 전형성의 손쉬운 교환 혹은 등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관계 안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오래된 길항의 축 위에서 알맞은 균형점을 찾고 그 고유한 위치성을 미학적으로 재현하는 노력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전형성 때문에 영화는 차라리 1.5세대에 대한 Ethnography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코리안 아메리칸, 혹은 다른 hyphenated identity의 소유자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또 내가 미적지근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추정.
- 아시아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어떤 경향성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 중 하나는 modesty가 아닐까. 혼종성과 과잉의 기치를 전면화 하면서 장르 영화의 전통과 문법에 대한 이해를 각자의 방식으로 비트는 영화들이 컬트적으로 소비되는 한켠에는 (출산을 하기 전)곤도 마리에의 얼굴이 대표하는 미니멀리즘처럼 야심과 에고를 제거한 소박한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채택한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도 후자에 속하는데, 이러한 절제와 단순함의 "갬성"이 어필하는 관객층이 누굴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에서 이상하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노라가 나중에 남편이 되는 인물을 처음 만났을 때 인연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주면서, 사실은 이거 한국 사람들이 "seduce"할 때나 하는 말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의도된 웃음포인트이면서 동시에 이 말을 내뱉는 노라와 이를 듣는 미래의 남편을 짝으로 묶어 이번 생의 연인으로 이들의 인연이 정의되는 순간. 그런데 이 대사는 마치 영화가 전생이나 인연이라는 말이 낯설게만 들리는 미국 관객을 "꼬시려는", 이 영화의 포지셔닝에 대한 메타 코멘터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인 Past Lives는 노라와 해성이라는 두 사람만의 관계를 이성애적인 것으로 국한하지 않으려는, 더 폭넓고 연속적인 관계성에 대한 작품의 지향을 암시하지만, 그 목표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으로 성취되는가? 영화에서 전생과 인연이라는 개념은 결국 이성애적 관계의 완성 혹은 실패(하지만 다음에의 기약이라는 가능성이 잔존하는)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만 이해되고 제시되고 있지 않는가. (이런 면에서 노라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태성과 남편만이 바에 남아서 "우리도 인연이다"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은 흥미롭지만 짧게 스쳐지나가며, 한편으로는 이 둘이 노라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인연이 된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관념조차도 페티시화 되어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이 너무나도 손쉬워진 시대, 지나치게 과시적이지 않아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계급적 안락함과 성공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소위 tasteful한 외양의 아시안 커플에게 past lives와 in yun을 물어가며 영화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숏폼 컨텐츠에 함의되어 있는 레이어들은 얼마나 무수한가. 영화는 시작하는 장면으로 노라의 양편에 해성과 미국인 남편이 앉아 있는 바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 셋의 대화 대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셋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유추하는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를 보이스 오버로 들려준다. 관객이라는 관찰자의 포지션과 관찰 대상의 구도를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시작은 (영화의 의도는 결코 아니었을) 결국 영화에서 전생과 인연이라는 관념이 신비롭지만 예쁘장하고 안전한 소비재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혐의와 맞닿아 있는것 같다.
- 유태오는 평범한 한국의 엔지니어 회사원을 연기하기에는 너무 잘생겼고 가슴도 너무 빵빵하다.
- 이 영화에서 절제되어 있는 다이얼로그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성인이 된 노라와 해성이 다시 만날 때, 둘이 보여주는 대화는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에서 그리는 남녀의 폭풍 수다(flirt와 learning이 혼합되어 있는)와 분명히 다르다. 새롭게 뿌리 내린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 K 장녀로서 부모님의 몫까지 의사소통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다 보니 노라의 한국어가 지워진걸까? 아무리 그래도 한국에서 그만큼 초등학교 다니고 갔으면 한국어를 그거보단 잘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자주 끊기고, 침묵이 많으며, 느릿느릿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skype의 배드 커넥션과 시차와 성장 배경으로 인한 언어적 능숙함의 차이로 이 메워지지 않는 틈이 생겼다고 봐야할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화가, 그리고 관계가 결코 끊기지는 않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비> / 20230721: 중복과 플라스틱 인형과 시네마의 미래 (0) | 2023.07.26 |
---|---|
Justin Peck's Choreography (0) | 2019.02.19 |
<히든 피겨스> (0) | 2017.04.18 |
<밤의 해변에서 혼자> (0) | 2017.04.05 |
<문라이트> (0) | 2017.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