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 월요일 오후 두시 십분. 


집에서 출발한 직후, 오후 일정 취소를 알리는 문자를 받고 갑자기 붕 떠버린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하다가 이왕 시내 나오는 김에 영화나 보자고 결심. <퍼스널 쇼퍼>나 <컨택트> 중 하나를 보고 싶었으나 시간과 동선이 다 애매했고,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과 배우진에 미셸 윌리엄스가 있길래 검색 시작 전까진 이름도 모르던 이 영화로 결정. 심지어 난 맨체스터도 지성팍의 그 맨체스터인줄 알았지 뭐야… 쨌든 보스턴에 사는 남자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라는 줄거리를 보고 가뜩이나 오늘 날씨도 추운데 뉴잉글랜드에서 찍은 영화라니, 생각만해도 더 춥다 하면서 상영관으로 입장. 


영화에서 좋았던 점.


- 플롯은 섬세했고,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영화의 초반부는, 끝나고 곱씹어 보니 이후의 전개를 세련되게 암시했었네. 예를 들면 이런거. 영화가 시작하면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그리고 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배 한 척을 본다. 삼촌 리는 조카 패트릭과 갑판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며, 그의 형이자 패트릭의 아빠 조는 배를 몰고 있다. 삼촌은 조카에게 묻는다. 니가 무인도에 간다면 아빠랑 나 중에 누구를 고를거야? 라는 질문을 한다. 조카는 아빠를 택하고, 삼촌은 조카의 대답이 서운한듯 다시 생각해보라며 장난을 건다. 리는 살갑고 정다운 삼촌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런데 이 질문은 이후 영화에서 리가 겪어야 할 상황으로, 즉 심장병을 앓던 조가 사망하면서 아직 미성년자인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리를 지정한 상황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리는, 무인도에 같이 가자고 할만큼 사랑하던 조카 패트릭을 맡는 일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왜? 도대체 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기실 영화의 흐름은 이와 같은 과거의 리와 현재의 리를 오가며 그의 과거와 내면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 바다 위에서 세 남자의 즐거운 시간을 보여주던 영화는 갑자기 보스턴에서 잡역부 생활을 하고 있는 리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세입자들의 온갖 불편을 처리하는 리의 단조롭고 고된 일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중 첫번째는 계속 새는 꼭지를 고쳐달라는 한 노인의 요구이다. 그는 열번을 고쳤는데도 계속 물이 샌다고 하며, 이에 리는 마개가 물을 제대로 stop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대꾸하며 마개를 갈든지 아니면 전체를 갈든지 알아서 택하라는 식의 미적지근한 답을 한다. 노인은 리에게 좀더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할 수 없냐고 역정을 내는데, 이 에피소드는 실상 맨체스터로 돌아간 이후 드러나게 되는 리의 과거를 은유한다. 아무리 고쳐도 결코 고쳐지지 않고 계속 물이 새는 파이프처럼, 그의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 영화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과거의 리와 현재의 리는 얼마나 다른 인물인가. 리를 연기한 케이시 에플렉의 갈곳없는 눈빛과 터덜거리는 걸음,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아이러니가 자아내는 마르고 쓴 웃음의 순간들이 의외로 인상적이고, 생각보다 꽤 깊숙한 곳을 찌른다. 예를 들면, 땅이 얼어서 형을 바로 묻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럭저럭 아버지의 죽음을 잘 견뎌내고 있는것처럼 보이던 패트릭이 냉동닭을 보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작은 유머도 매우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파이프를 고쳐달라는 노인 다음에는 가족 행사에 참석하는게 귀찮다며 불만 섞인 전화를 하는 할머니가 나오는데(이 때 리는 그녀 옆에서 전등을 갈고 있다), 이 때 그 할머니는 I could slit my throat이라고 말한다. 그 장면에서는 노인네 말 참 터프하게 하네 하면서 피식 웃었는데, 이후 리가 폭발하는 대목, 그러니까 권총으로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발버둥을 치는 장면에서 할머니의 그 무심한 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 영화는 결국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린다는게, 과거가 치유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리의 비극적인 과거는 생각보다 일찍 밝혀지는데, 이후 영화가 진행되면서 나는 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건가? 하고 생각했다. 아마 리 스스로도 조금은 그럴 수 있다, 그러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관객이 그렇게 착각할만한 상황 상의 변화를 몇 가지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배의 처분 문제가 그렇다. 영화의 남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던 그 배를 패트릭은 계속 갖고 싶어하지만, 그는 commercial vessel을 소유할 수 도 운전할 수도 없는 미성년인데다 리는 유지비에 모터 교체비를 감당할 수 없다며 배를 팔아야 한다고 갈등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가도 엑스 와이프인 랜디와의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사소한 실수가 그를 다시 주저앉힌다. 깜빡하고 올려둔 소스가 다 타버려 집안에 연기가 자욱해지자, 등장하는 환영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치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회복이란, 구원이란 얼마나 요원한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는 성급함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장면이 나온 뒤에야 리는 패트릭과 자신의 거취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방법을, 형 친구 데이빗의 도움을 빌려 마련해낸다. 자신이 이곳의 기억을 버텨낼 수 없음을 온전히 깨달은 것이다. 

 

- 리가 소중하게 보관하는 액자 세 개에는 과연 누구의 얼굴이 들어있을까. 어쨌든 이 액자를 발견한 뒤 패트릭은 "I can’t beat it"이라고 말하는 삼촌, 도저히 맨체스터에 살 수는 없다고 고개를 떨구는 삼촌을 비난하는 대신 그를 껴안고 위로해준다. 


- 미셸 윌리엄스는 그야말로 어메이징이다. 영화 시작하고도 한참을 안나오길래, 도대체 언제 나오는거야 하며 기다렸고, 그녀가 연기하는 랜디가 등장하는 시간은 뜻밖으로 작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건 역시 리와 마주친 그녀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폭풍처럼 미안함과 회한과 고통과 슬픔을 토해내는 랜디 앞에서 새카맣게 타버린 리의 심리적 황량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랜디를 두고, 바닥을 쳐다보면서 “There’s nothing there” 라는 말만 반복하는 리. 액션과 리액션의 완벽한 조응을 보았다. 미셸 윌리엄스는 정말 딱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리를 위한 이 영화의 supporting role을 완벽하게 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영화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몇몇 지점에서는 꽤 훌륭하다고 할 만한 순간들도 있다. (패트릭과 리가 다투는 장면들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의 상처난 manhood를 반추하는 멜로드라마”라는 이야기의 태생적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이 한계에 대한 나의 의심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모습을 드러내는 매우 작은,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상한 디테일에 의해 강화되었다. 


- 바다에서 시작한 영화는 바다에서 끝난다. 영화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면, 언 땅이 녹아서 형을 드디어 매장하고, 배의 모터 문제를 해결한 패트릭과 리가 어린 시절처럼 바다에서 웃으며 낚시를 하는 엔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엔딩이 과연 리에게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하는가? 바다는 어디까지나 도피처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제목을 떠올려보자. 여기서 중심은 바다가 아니라 맨체스터이다. 추위를 걷어갈 7월의 여름이 올 때 패트릭을 데이빗에게 맡기고 맨체스터를 다시 떠날 리의 미래가 암시하듯, 리는 영화의 제목과는 달리 맨체스터 대신 그 주변부인 바다에 머무르는데서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manhood의 추락과 훼손을 영원히 절망하는 이야기, 결국 백인 남성인 감독 케네스 로너건이 백인 남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로 보인다. (덧붙이자면, 뉴잉글랜드, 바다, 배, 그리고 육지를 떠나려는 남자의 조합은 <모비딕>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설정이다. 집에 와서 모비딕의 시작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난 바다로 가야해! 라고 외치는 이쉬마엘의 이 구구절절한 심경고백이라니. “Whenever I find myself growing grim about the mouth; whenever it is a damp, drizzly November in my soul; (…) that it requires a strong moral principle to prevent me from deliberately stepping into the street, and methodically knocking people’s hats off — then, I account it high time to get to sea as soon as I can. This is my substitute for pistol and ball.” 이 정도면 이쉬마엘과 영화 속 리의 상황을 구분하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 아닌가.)


- 나아가 재미있는 건, 이 도피처에 이들을 머무르게 해주는 배, 오래된 모터 때문에 팔아치워야할지 말아야 할지로 리와 패트릭의 갈등을 부추겼던 그 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국 지켜내는 이 배의 이름이다. 뱃머리에 큼직하게 써진 채,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서 두 번 보여지는 이 배의 이름은 Claudia Marie인데, 이 이름은 알고보니 형 조를 묻고 난 뒤 챈들러 가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 앞의 비석을 훑을 때 아주 잠깐 지나가는, 조와 리의 어머니 이름이다. 


-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 중 하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 누구의 아버지 등 부계의 관계를 통해 인물들이 소개되거나 언급되는 말들이다. ("저 사람은 리 챈들러에요. 패트릭의 삼촌이죠." "얘는 조 챈들러의 동생이야!" "자네가 그렇다면 xxx 챈들러의 아들인가?") 이러한 말들은 변변한 장의사도 없을만큼 작고, 그래서 누구나 누구를 알고 있는 곳으로 설정된 맨체스터의 지역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 세계에서 이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여성의 존재, 보다 정확히는 이 부계적 질서의 부속품인 엄마 혹은 부인의 존재는 남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들 별로인 인물로 그려진다. 패트릭의 엄마는 알콜 중독자였고, 랜디는, 복잡한 맥락을 단순화 시켜서 말하자면, 똑같이 상처입고 절망한 리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다가 자기 혼자만 새출발한 캐릭터이다. 이들은 남자들의 고단함과 남자들의 즐거움과 남자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가 겪은 끔찍한 사건도 따져보면, 리와 그의 친구들의 파티를 강제로 해산시킨 랜디의 잔소리에서 출발한다. Henpecking wife! 리는 랜디 때문에 깨진 흥을 혼자서라도 즐겨보겠다고 벽난로에 불을 켜고 맥주를 사러 나가는 거고. 다시 거리에서 마주쳤을때조차 리의 입장에서 보면 랜디는 헤어지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상처난 데를 후벼파고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이를 거칠게 종합하자면, 이 세계에서 좋은 여성, 혹은 무해한 여성은 죽은 여성이라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남성들의 유대에서 긍정되는 유일한 여성은 이미 비석에 그 이름이 새겨진, 배로 물화된 클로디아 마리라는 점에서 다시 확인된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소위 이 “선한”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의 주인이 영화 속에서는 단 한번도 제대로 등장하기는 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와 리 형제의 아버지도 영화 초반에는 등장하는데!) 다시 말해, 그녀의 이름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사내들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배의 이름으로만 영화 속 세계에서 그 효용가치와 자리를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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