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 토요일 6시. 2017년 극장에서 본 첫 영화.
J가 보러가자고 해서 명동 CGV에서 보았다.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무척 감동받았기에 그 작품보다 좋으려나 하는 궁금함과 함께. 그러나 한 때 에반게리온도 찾아 보고 J Rock 밴드 앨범도 몇 개 사본 적 있었지만, 시작부터 콧소리 낭낭한 보컬이 왕왕 노래하는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 특유의 문법을 담백하게 받아들이기는 역시 힘들었다.
서로의 삶에 불시착한 타키와 미츠하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세히 따지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가는 전반부는 소소한 재미도 있고 귀여웠다. 하지만 가볍게 핑퐁거리며 네트를 넘나들던 탁구공 같던 영화는 타키가 미츠하를 만나러 가면서 타키의 시점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러한 전환이 결국 도시와 시골, 남자와 여자 같은 일련의 위계를 그대로 투영한 이야기 진행이라고 느껴져서 별로였는데, 이는 미츠하의 모습을 처음으로 관객에게 세세히 보여주던 장면에서부터 느꼈던 실망감 혹은 불편함과도 관련있다. 치마 잠옷을 입고 자는 미츠하의 드러난 다리를 훑고 가슴의 곡선을 보여주고 얼굴로 올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만화/애니들이 여성 캐릭터를 관습적으로 그리고 보여주는 방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으며, 영화가 착실히 구축하는 순진하고 조신한 시골 소녀와 씩씩하고 정의로운 도시 소년이라는 구도는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소년이 여전히 미약한 소녀를 구하러 오는 이야기를 예비한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가 세월호 사고를 알고 영화에 반영했다는 "가만히 있으라"는 마을 방송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움찔했다. 굳이 그 대사가 아니어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넘어지고 구르는 미츠하와 친구들,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보는것은 충분히 괴롭고 슬픈 일이다. 무스비가 어쩌고 저쩌고하는 장면, 또 "너의 이름은!"을 무한 메아리치듯 외쳐대는 장면들이 슬슬 지겹다가도, 그런 장면이 나올 때면 끼고있던 팔짱을 풀었으니까.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이상했던 건 혜성이 마을과 충돌하던 그 순간이다. 마을이 완전히 박살나는 그 장면은, 쿵하는 충돌의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끽해야 서너컷으로 보여지고 처리된다. 후반부로 갈 수록 영화의 개연성이 점점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뭐 설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라고 느꼈지만, 영화의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또 그 직전까지 관객의 애타는 긴장감과 조마조마함을 계속 쌓아올렸던 흐름을 감안한다면, 그 존재감 혹은 위상에 걸맞지 않게 이 순간이 처리될 때 느꼈던 기이함은 결국 영화에 대한 나의 최종감상으로 남아버렸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으러 걸어가면서 이런 저런 감상을 나누던 중, J는 이렇게 예쁜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수성 있는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 같은 역사 인식문제에 있어서는 왜 그렇게 둔감한지 모르겠다, 라는 말을 했는데, 나에게는 엉뚱하게도 이 말이 혜성 충돌 부분에서 느꼈던 기이함 혹은 찜찜함을 들여다보는 열쇠가 되었다. 급박하거나 허둥지둥하거나 아니면 무성의한 전환 지점들, 특히 몸이 바뀐다는 설정을 추동하는 사건이자 영화 속 그들의 세계에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기는 사건이 진짜 벌어지는 순간은 그냥 그렇게 짧게만 다뤄지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다다르는 지점은, 바뀐 미래를 평화롭게 (그러나 아련하게)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결국은 다시 마주보고 "너의 이름은!" 하고 외치는 우연의 해피엔딩. 이 영화를 보고, 아니 재난이라는 말이 호명될 때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현 시대 일본인은 아마 없을 테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국가적 재난을 겪은 일본인들의 심리적 상실을 어루어만져주었기에 영화가 대히트 한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한다. (한국에서의 흥행에 대한 반응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영화의 이런 "어물쩍스러움"이 쌓여 완성된 마무리를 곱씹을 수록, 이런 해석은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현실은 최소한으로만 잽싸게 보여주고, 죽음은 면하지만 마을을 잃은 미츠하가 도쿄로 건너와 안온하게 살고 있는 미래로 급히 넘어오는 전개는 결국 떨어지는 혜성의 궤적을 아름다운 광경으로 소비하던, 도쿄의 타키로 대표되는 외부인들의 부채감을 휘발시켜주는 수준에 머무는게 아닐까. 즉, 이 영화는 재난의 순간, 재난의 충격을 재현하는데에 있어서 (비록 그것이 영화의 진짜 목표가 아니라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바라보고 기억하는데 최소한의 노력만을 기울이며,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때문에 어쩔 수 없기는 하면서도) 그 복기된 재난은 낭만화 된 스펙터클로 재현되는데 그치며, 영화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소년이 머무는 곳에 소녀를 그저 이식해버리는 식으로 이 둘의 세계를 이어붙이고 이야기를 끝낸다. 그리고 이런 결말은 색색의 실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엮어가는, 미츠하의 끈 같은 엮임이 아니라 힘주어 눌러서 그냥 이를 물려버리는 스테이플러 식의 봉합처럼 느껴진다.
하기 싫은 일을 미루려고 몇 자 간단하게만 끄적거려야지 하고 시작했는데, 역시 생각이 난삽하니 글도 난삽하고, 시간도 훌쩍 지났네? 흐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