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다시 태어나다


*

내 존재의 만족스런 부분만 기록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어쨌거나 그런 일도 거의 없지 않은가!) 오늘의 구역질 나는 낭비를 남김없이 기록하자. 스스로에게 느슨해져 내 미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21쪽)


*
이제부터 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건 아무리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라도 뭐든지 다 쓸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고급문화만 섭취한 데서 오는 일종의 바보 같은 자만심.
입은 설사병. 타자기는 변비에 걸렸다.

형편없어도 상관없다.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쓰는 것뿐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충분히 좋지 않다는 변명. (25-6쪽)


*

일기를 쓰는 것.

일기를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생각들을 담는 용기- 속을 터놓을 수 있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 문맹인 친구처럼 -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나는 그저 일기에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게 나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자신을 창조한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아아,)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많은 경우 - 그 대안을 제시한다. (213쪽)


*

글쓰기가 왜 중요한가? 주된 이유는 이기주의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갖고 싶기 때문이지, 해야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게 뭔가? 약간의 자부심- 이 일기가 기정사실화 하듯 -을 쌓아 올리면, 내게는 말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자신감에도 도달하게 될 것이다. (214쪽)



--------


수전 손택의 일기장도 별 거 없구나, 싶어서 더욱 좋았던 책. 그녀는 과연 자신의 사후에 이런 내밀한 속살까지 출간될 줄 알았을까? 

군데군데 적어둔 구절, 또 재밌는 부분도 다양했다. 윗 내용같은, 글 쓰는 이로서 필연적으로 갖는 원초적인 고민들부터, 핸드폰 생산성 관리 어플에 적어둘 법한 일상의 기록들까지. 이런 책을 읽는 기분이란, 뭐랄까, 누군가가 흘려두고 간 외투나 목도리 같은 것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면서 그 주인을 상상하는 일 같다. (변태 아님)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은실 - 목 없는 나날  (0) 2017.03.30
송승언 -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0) 2017.02.27
비스와바 쉼보르스까 - 쓰는 즐거움  (0) 2017.01.19
최승자 - 빈 난간에서  (0) 2016.12.18
오은 - 계절감  (2) 2016.12.11




대설주의보, 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라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열었더니 눈이 내리고 있다.

듣던 음악을 멈추고 마른 땅과 나뭇가지 위로 눈송이들이 조용히 모여드는 소리를 듣는다.

밤은 이렇게나 다정하다. 

나는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잘 모르겠고. 



'분류불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탄핵 인용  (0) 2017.03.10
열흘째 낫지 않는 감기  (0) 2017.02.13
사라진 메일과 쪽지들  (0) 2017.01.09
다시 태어난다면?  (0) 2016.12.27
결심  (0) 2016.12.11


<쓰는 즐거움>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투사지 위에 씌어진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 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 아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고요" -- 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구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선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눈 깜빡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 고리를 동여매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


쓰는 행위, 그리고 이를 통해 써지는 것들과 구축되는 세계에 대한 글쓴이의 완벽한 지배,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즐거움이라...

나같은 옹알이는 도통 알 리 없는 거장의 희열이네.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승언 -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0) 2017.02.27
수전 손택 - 다시 태어나다  (0) 2017.01.24
최승자 - 빈 난간에서  (0) 2016.12.18
오은 - 계절감  (2) 2016.12.11
심보선 - 새  (0) 2016.12.11


여느 때처럼 울적한 생각이 이리저리 치닫는 밤, 미국에 있을 때 엄마와 주고받던 메일들을 읽고 싶어져서 (조금이나마 힘이 될까 싶어) 안 쓰던 핫메일 계정에 어찌어찌 해서 간신히 접속하였는데 (한 5년만인가...) 메일이 몽땅 사라져있다! 찾아보니 MS가 각종 서비스들 통합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접속 안 된 계정들은 청소를 했다고... 365일 동안 inactive일 경우 다 삭제하는게 terms of agreement에 있다는데, 읽을 수 없다니 더 간절하다. 


핫메일에 뭐가 들었지, 또 이렇게 사라진 기록들이 뭐가 있으려나 하고 생각하다가 싸이월드까지 접속 했다. 그리고 내가 찾고 싶었던 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친구 R의 기억인가 싶어졌다. 싸이월드 아이디는 뭐였더라. 이것도 빌어먹을 핫메일 아이디였네. 여러번 시도 끝에 패스워드 찾는 것도 성공했지만, 여기도 다 사라져있네. 재작년인가 한창 백업 열풍 불 때 글은 안 사라진다고 해서 다이어리는 나중에 필요할 때 봐야지 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이어리 글도 하나도 안보이고... 여기도 검색해보니 싸이월드 측에서 서비스 재정비하면서 일촌평과 쪽지 등 마이너한 기록들은 다 삭제했다고 한다. (글은 고객센터에 신고하면 복구가 되나? 흠...) 그 친구와 주고받았던 마지막 쪽지가 갑자기 이렇게 애타게 될 지 그때는 몰랐었네. 사실 핫메일에도 그 친구가 보낸 메일이 서너 통쯤 있었다. 읽었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던 메일들... 그 친구한테 답장한 내 마지막 쪽지가 어땠는지, 그 친구가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 조각조각 깨져버린 기억들을 어떻게든 복구하고 싶지만, 다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아이가 너한테 하는 마지막 연락이야, 같은 말을 했었던가. 


너.

이렇게 별 것도 아닌 나를 언제나 대단하게 봐주었던 너.

내가 한 때 반짝거릴 수 있었다면 그건 너 덕분이었는데.

세상에 정붙일데가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매일 밤 울 때, 먼 곳에서도 니가 변함없이 보여준 애정의 온기로 버텼던건데.

늦게나마 그걸 깨달았을 때 조차 나는 너한테 정말 고마웠다고, 진심과 정성을 담아 먼저 인사해주지 못했구나.

니가 나한테 전한 니 마지막 소식의 흔적조차 나는 무심하게 잊고 있었네. 


어찌 보면 그냥 0과 1의 조합일 뿐인데, 그 아무것도 아닌 무미건조한 두 숫자가 얽혀서 만들어낸 덩어리를 통해 우리는 소통을 하고 마음을 나눈다. 그리고 그 덩어리들은, 어딘가에 무한히 저장가능한 0과 1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라지지 않을거라고 방심하고 대충 보관해두고 있다가, 뒤늦게 그걸 잃고 애달파한다. 


0과 1이 만들어낸 매끈하고 완전한 기록들은 사라졌으니, 울퉁불퉁하고 불완전한 내 머릿속 조각 기억이라도 잘 붙들고 있을 수 밖에. 살면서 그 친구와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시 마주치는 행운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그때는 잊지말고 지금의 그리움과 고마움을 먼저 진심으로 전해주자는 다짐을 간직하면서.



'분류불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흘째 낫지 않는 감기  (0) 2017.02.13
눈 오는 밤  (0) 2017.01.20
다시 태어난다면?  (0) 2016.12.27
결심  (0) 2016.12.11
2ne1 잘가...  (0) 2016.11.25




젊은 친구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이라네

둥글고 축축하고 북적대는 곳이라네


자네 이곳에서 고작해야 백년이나 살까

세이프 섹스를 하고 새 생명을 내보내지 말게

이 지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만들었다네

믿을 수 없다면 조간 신문을 사서 읽어보도록 하게

어떤 신문이든 어떤 날짜든 상관 없다네


젊은 친구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이라네

둥글고 축축하고 북적대는 곳이라네


자네 이곳에서 고작해야 백년이나 살까

세이프 섹스를 하고 새 생명을 내보내지 말게

이 지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만들었다네

믿을 수 없다면 조간 신문을 사서 읽어보도록 하게

어떤 신문이든 어떤 날짜든 상관 없다네


---------------


우연히 알게 됐는데 중독적이다. Beirut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 Regina Spektor 느낌도 스쳐지나가고. 

이 노래는 2집의 마지막 곡.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트랙도 강추. 멋진 창작자를 알게 된것 같아서 기쁘다. 


아 나도 생머리였음... 헤어스타일이랑 생긴것도 너무 취저.





J언니의 급 카톡을 받고 오랜만에 학교 사람들 몇몇이 모이는 자리에 끼게 되었다. 가기 전에는 너무 우울했지만, 막상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니 역시 이런저런 다양한 수다를 나누며 기분이 좀 풀렸다. 그 중에 재밌었던 이야기 토막 하나를 남기자면. 



한 친구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시민들 대상으로 교육워크샵 같은걸 진행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해 상상해보세요, 라는 질문을 던지면 50대 이상은 이루지 못한 꿈이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이런저런 대답을 내놓는데, 오히려 10대, 20대는 다시 안 태어나고 싶다고 하더란다, 하는 주제를 꺼내놓았다. 우리는 역시 헬조센이군! 하며 젊은이들의 답변에 공감하고, 각자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K 언니는 "그냥 고요한 바닷속 미역?"이라고 했고, 다른 언니들도 바위나 나무 같은 자연물, 아니면 부잣집 고양이 같은 소망을 고백했다. 나는 뭐가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콸콸 흐르는 용암의 이미지가 갑자기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와 너무 멋지다. 내가 한번 뿜으면 니들 다 죽거나 다쳐. 자주 울컥하고 자주 화나고 자주 들뜨는, 요즘의 나와 너무 딱 맞는데...  "나는 활화산 할래요, 아님 활성 단층 같은거. 다시 태어나는 거 생각만해도 괴롭지만, 그래도 태어나야한다면 대빵 힘 센걸로 태어나고 싶네." 다들 웃으면서 "요새 많이 힘들었구나"와 같은 말들을 건네주었지만, K 언니는 미역 같은 하찮은 미물을 떠올린 자신의 스케일에 반성한다며 나의 답을 높게 사주었다. 우리는 카톡 프로필 메시지를 샌 안드레아스로 바꾸자면서 한참을 깔깔거렸다. 



집에 오는 길에, 앞으로 K 언니랑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를 떠올렸다. 멜랑콜리아의 운석으로 태어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중력의 궤도를 타고 지구를 향해 힘차게 돌진하는 미지의 운석. 다양성 영화라는 불분명한 이름을 달고 독립영화 시장을 잡아먹으면서 재개봉되는 영화들 솔직히 반기지 않지만, <멜랑콜리아>만큼은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지만 안되겠지. 그 영화는 수지타산 안맞을거야...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 같은거 열렸으면 좋겠다. 극장에서 그의 영화 전부 다 보고 우울의 독에 빠져버리고 싶어. 



'분류불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오는 밤  (0) 2017.01.20
사라진 메일과 쪽지들  (0) 2017.01.09
결심  (0) 2016.12.11
2ne1 잘가...  (0) 2016.11.25
폭염아 물렀거라  (0) 2016.08.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