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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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의 만족스런 부분만 기록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어쨌거나 그런 일도 거의 없지 않은가!) 오늘의 구역질 나는 낭비를 남김없이 기록하자. 스스로에게 느슨해져 내 미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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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 것.
일기를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생각들을 담는 용기- 속을 터놓을 수 있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 문맹인 친구처럼 -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나는 그저 일기에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게 나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자신을 창조한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아아,)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많은 경우 - 그 대안을 제시한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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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왜 중요한가? 주된 이유는 이기주의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갖고 싶기 때문이지, 해야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게 뭔가? 약간의 자부심- 이 일기가 기정사실화 하듯 -을 쌓아 올리면, 내게는 말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자신감에도 도달하게 될 것이다.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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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일기장도 별 거 없구나, 싶어서 더욱 좋았던 책. 그녀는 과연 자신의 사후에 이런 내밀한 속살까지 출간될 줄 알았을까?
군데군데 적어둔 구절, 또 재밌는 부분도 다양했다. 윗 내용같은, 글 쓰는 이로서 필연적으로 갖는 원초적인 고민들부터, 핸드폰 생산성 관리 어플에 적어둘 법한 일상의 기록들까지. 이런 책을 읽는 기분이란, 뭐랄까, 누군가가 흘려두고 간 외투나 목도리 같은 것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면서 그 주인을 상상하는 일 같다. (변태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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