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월요일 조조.
여기저기서 난리길래 나도 보았다. 꿈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영화다, 정도에 대한 정보만 갖고.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거부감도 좀 있고, <비긴 어게인>처럼 음악 영화의 외피를 둘러쓴 뮤직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래도 <위플래시>를 만든 감독이니깐 좀 다를까 싶어서 봤는데... 역시 이건 뭘까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이었다. 호오가 뚜렷하게 갈린다는 반응도 이해가 갔고.
예쁜 도시에서, 예쁜 남녀가, 예쁘게 옷입고, 예쁘게 춤추고, 예쁘게 노래하고, 예쁘게 사랑하고, 예쁘게 성공하고, 예쁘게 헤어지고, 예쁘게 아련하고....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영화 참 예쁘게, 납작하게 만들었네, 하는 생각. 그리고 "perfectly manicured"라는 표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의 맨 처음이었던가, 아님 마지막이었던가. "Made in Hollywood"라는 인장을 화면 하단에서 분명히 보았던 것도 같고.
처음에는 클리셰적인 캐릭터 설정이나 서사 흐름도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 영화의 내러티브 규칙을 따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럴 수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노래나 춤이 인상 깊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잘 만든 음악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내적 댄스를 추게 만든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지론인데, 이 영화의 춤과 노래는 장면이 끝나는 순간 그야말로 (이 영화를 수식하는 형용사들중 아마도 빈도가 가장 높았을 단어를 빌리자면) "마법처럼" 휘발되어 버렸다. (<비긴 어게인>은 멜로디가 catchy하기라도 했지... 심지어 극장을 나서면서 머리에 맴도는건 세바스챤이 알바로 일하던 밴드가 수영장에서 연주하던 a-ha의 "Take on me"였다. 빌어먹을 신디사이저여.) 이는 음악을 담당한 이의 실패라기 보다는 결국 실감나는 인물로서의 레이어를 결여한 캐릭터 설정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영화의 출발은 각자의 꿈을 쫓는 두 남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들이 왜 이러한 꿈을 희망하는지 이해하고 이를 응원하게 만드는 공감과 지지의 토대를 정밀하게 설계하는데 관심이 없다. 여주인공 미아가 오디션을 치루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데, 막상 그 순간 미아가 부르는 노랫말의 진짜 주인공이 미아가 아닌 미아의 고모/이모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미아의 꿈과 욕망은 미아의 것인가? 아니면 센 강에 몸을 던져보는 걸 주저하지 않을만한 열정의 소유자였으나 결국은 평범한 아동극단의 배우로 그치고 말았던 고모/이모의 것인가? 캐스팅 디렉터의 눈을 잡아 끌만한 미아의 1인극에 대해 관객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So Long Boulder City"라는 제목 뿐이다. 세바스챤의 꿈 또한 뭔가 핀트가 안맞는다. 잘나가는 밴드 리더(존 레전드가 갑자기 나와서 당황했다...)가 선뜻 탐낼만한 훌륭한 건반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은 (<위플래시>의 주인공의 꿈이었던) 일류 연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즈바를 여는 것이다. 또 레스토랑에서 징글벨을 치면서 재즈바를 열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음반과 투어가 보장되는 밴드의 일원으로 바짝 일하는게 당연히 더 나은 길이기에, 세바스찬의 시련은 그다지 안타까운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물들의 출발과 갈등과 성공은 모두 지나치게 얄팍하게 그려지고 손쉽게 처리된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빈약한 설계 또한 감독의 철저한 의도라는 점이다. 꿈과 인물에 대한 빈곤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테마, 즉 꿈과 사랑 중 전자를 선택하며 결말을 낸다. 이러한 결말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인, "What if?"의 모든 가능성들을 빠르게 훑는 마지막의 감흥을 오롯이 끌어올리기 위해 이 영화가 쉬임없이 달려왔음을 반증한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두 남녀가 한 때 꿈꿨고 간절했던 그 모든 낭만과 애틋함에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나 또한 그 장면에서 울컥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 반응과 별개로, 영화를 곱씹을 수록 떨치지 못하는 꺼림칙함과 지나치게 편리하고 예쁘기만 했던 모든 서사적 장치들은 이러한 결말이 영화의 메인 서사를 "선남선녀의 완성되지 못한 애틋한 로맨스"로 위장해버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이 때 이 의심은, 로맨스의 본질을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허구로 정의해버리는 감독의 기이하고 슬픈 비관주의를 발견하는 이동진의 평과 그 맥이 닿아있기도 하다. 즉, 나의 불편함은 동화같은 장르적 문법의 외피를 빌려 감독이 이 비관주의를 철저히 숨겨놓았다는데서 비롯된다. 모든 이들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꿈의 공장 헐리우드는 꿈을 이뤄주는 조건으로 미아와 세바스찬에게 그들의 사랑과 삶이 결합되어 있는 그 도시를 떠날 것을, 즉 그들의 이별을 요구한다. (세바스찬이 집을 떠나 투어를 하러 다니면서 이들의 관계는 삐걱대고, 이들의 이별을 결정짓는 것으로 추정되는 원인은 미아의 파리행이다.) 이러한 결말과 설정, 그리고 작품의 서사와 화면을 구현해낸 방식에서 추론되는 감독의 태도랄까... 즉 먼지 한 톨 없이, 단지 결말의 아련한 인상을 위해 불필요한 디테일과 불균질한 결을 필사적으로 감추거나 생략해버리는, 철저하게 계산되어 꽉 짜인 그 인공적인 영화의 질감에서 감독의 인간관, 혹은 세계관이 무자비하고 비정하다고 느끼는건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일까? 괴물 같은 선생 밑에서 그 제자마저 괴물로 완성될 때, 마치 그 순간을 긍정하는 듯한 여운을 주며 끝나버리는 <위플래시>는 서사와 표현방식이 감독의 이러한 면모와 솔직하게 결합되어 드러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으나, <라 라 랜드>는 이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곡성>에 대해서 "위로가 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 나홍진의 인터뷰에서 느꼈던 당혹감과 불편함이 떠오른다. 도대체 그 출구 없는 절망의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어디에 존재했던가.)
인상적인 롱테이크로 완성된 영화의 시작이 지나간 뒤, (엄청난 리허설을 통해 완성되었을 이 군중 씬에도 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익숙치 않은 시네마스코프의 비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화씨 80도가 넘는 캘리포니아의 햇빛 아래 한참 서있었던 차들의 본네트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맨살을 대고 춤춰야했던 댄서들의 피부를 걱정한 나의 오지랖 때문이기도 하다...) 미아가 차에서 연습하는 대사는 감독이 관객에게 건네고 싶었던 메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아는 "It's pure insanity"라고 연습하다가, 정확한 대사는 "insanity"가 아니라 "lunacy"임을 확인한다. 본래 말하고자 했던 단어, 그리고 이 두 단어 간에 놓인 교환 가능성(interchangeability)은 영화에서 상충되는 꿈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해석의 방향을 제공해주지 않는가? 미아와 세바스챤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첫 키스를 나누는 시간은 모두 달이 떠있는 밤의 시간인데 비해, "너를 영원히 사랑할거야(I'm always gonna love you)"라는, 필연적인 이별의 예감을 부정하지 않는 이 말을 주고받는 순간은 밤의 마법이 사라진 한낮이다. 차올랐다가 기울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그 형태가 결코 고정되지 않는 달처럼, 두 연인의 로맨스는 혹은 그들의 로맨스를 지탱하는 환경과 조건은 영원히 그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감독이 구축한 <라 라 랜드>에서 사랑과 꿈 모두가 이루어지는, 마법같고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은 "정신나간"(insane) 짓이다.
*이 영화에 대해 쓴 글 중 (아직 다섯 편 정도 밖에 안 읽어보았지만) 가장 신랄한 평은 Richard Brody의 글인것 같다. 제목부터 "The Empty Exertions of La La Land".
**얄팍하고 납작한 이 영화가 사랑 받는 이유는 결말의 한 방이 물론 제일 클테지만,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의 캐스팅도 적절하다. 아이폰을 쓰는게 종종 어색하게 느껴질만큼 현대성이 거세된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하는데는 인물들의 의상도 한 몫하는데, 거적대기를 입어도 필히 스타일리쉬 해보일 기럭지의 소유자 엠마 스톤이 레트로 느낌이 물씬나는 드레스들을 연이어 입고 나오는 것도 눈이 즐거운 포인트이다. 거기다가 예의 "사랑에 실패해 쓸쓸하고 아련한" 남주의 얼굴은 라이언 고슬링이 배우로서 구축해놓은 자산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터.
***영화를 지배하는 푸르스름하고 보라색이 섞인 하늘의 풍경은 너무 예쁘다. 9월의 magic hour를 기다려서 찍었다는 이 전경을 실제로 보고 싶다. 나 LA도 갔었는데, 왜 그리피스 천문대도 못간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