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물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몸을 적시게 된다는 사실도 함께 유념해야 한다. 물에 몸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는 없다. 몸에 묻은 물이야말로 강을 건넜다는증거이다. 당신은 몸에 물을 적심으로써만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혹시 당신은 몸에 물을 적시지 않고도 강을 건너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가령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틀린 생각이다. 그 경우에 강을 건넌 것은 비행기나 배지 당신은 아니다. 당신은 다만 비행기나 배에 타고 있었을 뿐이다. 몸으로 건너야 한다. 몸이 건너야 한다. 발이 젖고 머리가 젖고 입 속으로 물이 들어갈 때 비로소 강을 건넜다고 할 수 있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쓰기는 전혀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압축과 비약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도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물이 당신의 몸속으로 스미게 해야한다. 그 길 밖에 없다.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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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과 비약이라는 허깨비의 유혹에 빠지지말것.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시간을 몸으로 버틸 것. 깊고 넓은 강을 건너려면 온몸이 젖는 것 만으로도 때로는 부족하다는 것. 그렇기에 젖어야 하는 숙명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담대하게 마주할 것. 이것은 삶의 태도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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