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즐거움>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투사지 위에 씌어진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 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 아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고요" -- 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구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선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눈 깜빡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 고리를 동여매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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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행위, 그리고 이를 통해 써지는 것들과 구축되는 세계에 대한 글쓴이의 완벽한 지배,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즐거움이라...

나같은 옹알이는 도통 알 리 없는 거장의 희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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