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I 장학금을 두고 해보는 몇 가지의 셈

(현행 장학제도의 지급액과 장학 자격의 제한 요건에 대한 단상)

 

 

필자와 같은 파워문과 인문대 대학원생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순간은 대체로 보잘것 없는 소득과 지출을 저울질 하고, 그 비교의 결과값이 양수든 음수든 어쨌든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숫자로 수렴되도록 최선의 방안을 궁리하고 점쳐보는 경우이다. 가장 최근에 했던 셈은 도서 매입 전략과 관계된 것으로,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이는 인터넷 서점의 할인 쿠폰을 어떻게 먹일 것인지에 대한 계산이었다. 곧 시작될 새 학기의 수업에서 읽을 도서의 구입 총액이 20만원쯤 되는 상황에서, 장바구니를 한 번에 결제하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 "N만원 이상 구매시 N천원 할인"이라는 이름으로 발급된 여러 장의 쿠폰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야될 책들의 금액을 각각 적어보고,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한 뒤, 분산 결제를 할 필요가 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궁핍한 대학원생에게 이같은 셈이 필요한 순간은 자주 찾아오고, 이 셈의 뒷맛은 대체로 씁쓸하다. 입이 써질 것을 알면서도 또다른 덧뺄셈을 해볼까. GSI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최소 6학점 이상 수강, 학과사무실에서 배정하는 주당 N시간의 근로, 그리고 담당 교수가 요구하는 불/규칙적 업무 수행의 의무를 가진다. 그렇다면 학생 입장에서 이같은 의무를 이행하는데 드는 최소 비용은 얼마일까? 여기 학교에서 적당한 거리가 있는 서울 시내에 거주하면서 석사과정 중인 대학원생이 있다고 치자. 이 학생은 등록금을 면제받고 월 20만원을 지급받는다. 학교에 오는 날, 이 학생은 1250원의 지하철 기본 요금에 거리와 환승 추가 등을 감안하면 왕복 차비로 최소 3000원 이상을 지출한다. 근무든 수업이든 학교에 오면 최소 반나절은 머무르기 때문에 3000천원에서 5000원 사이의 학식을 1회 혹은 2회 정도 먹게 되며, 이에 하루의 식비를 4000원, 1.5회로 계산하여 6000원이라고 하자. 수업을 듣는다면 아무래도 읽어야할 자료나 제출할 과제물 등의 인쇄비가 발생할터. 20페이지짜리 학술논문 한 편을 장당 50원에 인쇄하면 1000원이 든다. 택시를 탄 것도 아니고, 비싼 밥을 먹은 것도 아니고, 읽어야하는 수백 장의 자료 중의 극히 일부를 인쇄했을 뿐인데, 이 학생은 벌써 만원을 지출했다. 6학점 이상 수업을 듣고 그 외 각종 근무를 수행하려면 일주일 중 이런 하루는 최소 3회가 되며, 이를 4주로 계산하면 12만원이 된다. 20만원을 수령할 수 있는 조건을 정말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는데에만 12만원이 들고,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학교에 나와서 공부를 한다면 20만원을 고스란히 다 쓰게 되는 셈이다. 

 

이 말도 안되는 계산을 하다보니 입이 쓴 게 아니라 눈이 촉촉해진다. 이 계산에 얼마나 다양하고 예측불가능한 삶의 비용들, 주거비, 통신비, 의료비, 기타 교육/의복/문화생활비 등등이 제거되어 있는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핵심은 장학생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유지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이 지급되는 장학금을 거의 소진하다시피하는 현행 수준에서 “장학금의 혜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비는 커녕, 학업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사는데 자연스레 수반되는 지출들, 예컨대 수업이나 근무가 없는 날에도 연구실에 나오고, 필수 도서가 아닌 책을 추가로 사서 읽거나 외부 강연을 수강하고, 학우들과 차 한 잔을 마시기에도 턱없이 부족해서 자꾸 셈을 해야하는 금액을 지급하면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학교의 주장은 학생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떤 교수님은 "요새 학생들은 하고 싶은게 많아서 장학금 받으면서도 과외하느라 바쁘다”와 같은 발언을 하며, 이 말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당장 저녁에 일을 하러가야 하는 대학원생의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는다. 

 

학업에 전념하기는 커녕 학업을 유지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금액을 지급하면서 학교는 학생의 연소득이 1200만원을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추가로 내세운다. 이 1200만원이라는 금액은 또다른 셈을 하게 만든다. 우선 이 금액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결정된 것인가? <강의.연구지원장학금 관리지침>에 따르면, “근로소득 연 1200만원 이상 소득자”에 대한 자격 제한 내용은 공식적으로 2019년 1월 29일 자 개정을 통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기준이 그 당시 어떤 기준에 의해 산정된 금액이라면 (가령, 2019년도의 법정 최저임금 N원*월 N시간의 근로 기준) 이 조건은 어째서 2020년에 새롭게 조정되지 않았는가. 조정하지 않았다면 그 결정의 근거는 무엇이며, 학교는 앞으로 언제까지 이 조건을 유지할 것인가. (2025년에도 소득 제한은 여전히 연간 1200만원일까?) “연간 1200만원”의 근거가 무엇인지,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애초에 있었던 것인지 묻고 싶다. 나아가, 연 1200만원(월 100만원)이라는 금액이 과연 장학금의 신청자격을 자동적으로 제한할만큼의 소득 수준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0년 1인가구 기준 중위소득(예전의 최저 생계비)조차 월 105만원이 약간 넘는다. 그렇다면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셈해볼 때, 소득 제한선은 아무리해도 최소 1870만원(105만원*12개월 + 등록금 310만원*2학기)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즉, 연간 1200만원이라는 현재의 소득 제한 기준은 최소한의 생활비와 대학원 교육과정에 요구되는 비용의 규모에 턱없이 모자라며, 따라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수준으로 상향조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지침>은 “학문후속세대의 소양과 인격을 갖추었다고 인정되는 대학원생”으로 장학 자격을 정의하면서, 그 세부 요건으로 “근로소득 연 1200만원 이상 소득자는 제외”한다고 명시한다. 이말인즉슨, 소득 수준이 연 1200만원 이하인 학생들만이 “학문후속세대의 소양과 인격을 갖추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 최저 생계비에도 미달하는 소득 규모가 학교 측이 “인정”할 수 있는 “학문후속세대의 소양과 인격”인가. 이 출처불분명하고 비현실적인 금액에 소위 "인정가능한" 대학원생의 소득 수준에 대한 학교의 어떤 시각이나 판단이 함의되어 있지는 않은가. 이같은 학교의 시선에서 연 1190만원을 버는 대학원생과 1210만원을 버는 대학원생 간에는 과연 차이가 있을까 없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장학금을 신청할 수 없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대학원생과 관련한 유명한 짤이 하나 생각났다. 아마 거의 모든 대학원생이 한번은 접해보았을,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한 시퀀스의 캡처이다("심슨 대학원생 짤"로 검색하면 나온다). 바트 심슨이 잘라낸 꽁지머리를 뒤통수에 갖다대면서 자신이 대학원생이고 작년에 600달러를 벌었다고 말하자, 마지 심슨은 "얘야, 대학원생 놀리지마라. 그들은 단지 잘못된 선택을 한것 뿐이야"라고 타이른다. "꽁지머리"와 "연소득 600달러"로 대학원생을 정의하는 아들과, 대학원에 간 것이 잘못된 선택임을 아주 당연하게 상정하고 있는 엄마의 대화가 자아내는 쓴 웃음. 이제까지는 웃고 넘겼던 짤인데, 몇 번의 셈을 하고 난 지금은 "꽁지머리"와 "연소득 600달러"가 새삼스럽다. 생활비라고 받는 장학금이 부족해서 미용실도 못가고 결국 꽁지머리를 하게 된, 그런데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만큼의 소득활동을 제한받는 그런 처지의 대학원생을 상상하게 되면서 괜시리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싱숭생숭함은 분명 장학금을 받는데도 여전히 생활비 걱정에 아르바이트를 놓을 수 없는, 그러나 "소양과 인격"을 잃을만큼 많이 벌어서도 안되는 기묘한 처지에 놓인 대학원생만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J가 장학처랑 협상할 때 필요하다고 부탁해서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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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영원히 타인일 타인 때문에 내 생활과 내 감정이 휩쓸리고 침범 당하는게 너무 지친다. 

나라는 인간의 중심이 아직도 단단히 여물지 못했음을 또 한 번 절감하면서, 나를 다지는데 집중하겠다고, 함부로 집어삼켜지지 않겠다고, 오직 나만을 위해 성실하겠다고 하루에 열 번씩 다짐하는 요 며칠이다. 

 

Who says I can't get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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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창밖을 보니 눈이 펑펑 오길래 나가려던 계획을 캔슬하고 칩거를 선택했다. (뭐 언제는 집밖에 그렇게 나갔다고!)

살다보면 뉴욕쯤은 또 갈 수 있겠지. 그때는 꼭 링컨 센터에 가서 NYCB 공연을 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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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ㄷㅎㅇ 면접이자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던 날. 지극히 사적인 나의 이 일정과 정운호의 원정도박이 쏘아올린 공(?)의 최종 결과, 그러니까  한반도의 이 운명적인 날이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 하면서 아침에 곱게 화장을 하고 평소에 입던 것보다 스물 세배쯤 신경써서 고른 옷을 입었다. 만약 이런 무드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리고 이 길에서 탈락하지 않고 job market에 나갈 때, 남한이 섬이 아니라 진정한 반도국가가 된다면 밥은 굶지 않겠구나 하는 막연한 낙관과 함께. 


내가 쓴 글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다. 이상한건, 싸이월드나 블로그에 남긴 글들은 다시 읽는게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인쇄되어 나온, 그러니까 종이 위의 찍힌 활자들이 갖는 그 물성은... 그 물리적 존재감 때문인지 쳐다보기는 커녕 만지는 것도 너무나 괴로운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접 때문에 수치심과 싸우며 그 글자들과 싸워가며 오늘의 일정을 맞았는데...


막상 면접장에 들어가자 면접 위원들의 조합이랄까, 그 태도가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일단 피면접자는 온통 여자인데 면접자가 남자들 밖에 없다는 것도 그랬고 (물론 면접 위원을 선정하는데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I could clearly see they were not interested at all in what I said and who I am. 당황스러운 질문에 횡설수설하다가 십분만에 다시 방을 나오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더러운 기분. 


연구실에 돌아와서 계속 옆 짝인 ㅎ과 면접의 불쾌함 혹은 불편함에 대해서 실컷 떠들었다. 그러던 중 ㅎ가 "언니 오늘 일기 쓸거면 우리가 한 이 얘기들 꼭 적어요"라고 했던 것도 기억에 남네. 그래서 적는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우리가 이 길을 선택하는 것에 일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지, 또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그 깊이를 이해해주는 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없어 보였던, 혹은 그 고민 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려는 모 선생님의 태도. 의도는 알겠는데, 그 태도 자체를 일종의 젠더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나는 ㅈ 선생님과의 일화를 털어놓았다. 어째서 많은 학생들은 ㅈ 선생님을 좋아하는가?로 이야기가 흘러갔고, 우리는 모두 직업인으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간의 충돌과 갈등에 순수하고 또 솔직하게 고뇌하는 ㅈ 선생님의 모습이 우리가 그분을 애정하는 이유임에 동의하였다. 나도 그 중의 한명으로서. 나는 ㅈ 선생님을 만나고서 비로소 내가 따르고 싶은 롤모델을 만났다라고 느꼈다, 라면서 이야기했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교육자로서, 학자로서, ah I wanna be like her and I tell you, it is very hard to find that so-called "role-model" for you as a woman and an individual with a passion for a life of the mind.  또 우리는 요새 어떤 선생님이 소위 " 상한가" 이고 어떤 선생님이 "하한가"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스승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고 또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체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이 말을 쓰면서 나는 내가 흠모하고 애정하는 나의 동기 J가 지적했던 점을 떠올린다. "대학원은 그토록 극심한 여초인데, 어째서 교수사회에서의 성비는 그와 일치하지 않을까?) 텍스트와 나와의 거리는 얼마만큼이 적당한 것인가. 그 거리를 ~로 채워야 한다는 academic discipline의 규칙, 혹은 그것에의 강박. 이것은 정말 필수적인 것인가? 그 룰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리고 완전무결한것인가 과연? 


이런 의문들, 불만들을 터뜨렸다가, 각자의 공부거리에 집중했다가, 또 터뜨렸다가를 반복하던 하루였다. 


집에 오는길, 지하철에서 하드커버의 책을 진지하게 읽고 있던 중년의 남성을 발견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희귀하기에, 나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대놓고 계속 쳐다보면서 그 사람이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이제껏 가장 특이했던 케이스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Sherwood Anderson의 책을, 그것도 원서로 읽고 있었던 경우였다) 그 아저씨의 앞머리는 살짝 부분 가발 같기도, 그러니까 황교안 전 총리의 그것 같기도 했다. 내릴 곳이 되자 그는 책을 덮었고, 그가 읽던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사실 어제밤,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 행위는 대학생 때나, 그러니까 하릴없이 시간이 많을때, 되도록이면 어릴 때 읽는게 장땡이며, 마흔이 넘어서는 그 작품의 본질을 삶에서 배우기 때문에 그 대책없이 긴 소설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한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던터라,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있던 그 사내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어째서 그 책을 읽고 계신가요? 재밌으신가요? 재밌다면 어떤 부분이 그런가요?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도서관의 대출도서라는 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책을 소장이 아니라 대출해서 읽는다고?)  나는 내리는 그 사람을 붙잡고 이런 의문들을 퍼붓고 싶었다. 내가 그 아저씨를 자꾸 보는 것이 느껴졌던 것일까, 아저씨와 눈이 몇 번을 마주쳤다.


집에 오는 길, 여전히 더러운 기분을 떨치지 못해, 그리고 주말에도 새벽에 출근하는 동생의 아침 거리를 마련해야 하기에 집 근처 슈퍼에 들러서 갈아먹을 토마토를 사고 맥주와 꼬북칩 새우맛 큰 봉지를 샀다. 먹을까말까를 네 번은 고민했던 것이었다. 살이 찔까봐, 소화가 안될까봐 등을 이유로 슈퍼에 갈 때마다 시도해 보지 않았던 신제품. 오늘은 화장도 잘됐고 (많은 이들이 오늘  예쁘다고, 진심이라고 믿고 싶은 기분 좋은 말들을 해주었기에) 옷도 신경써서 입고, 머리도 차분했는데, 결국 밖에서 번개를 소집하는 일에 실패했으니 집에서라도 마셔야겠다는 일념으로 하나 남은 과자를 집어 들고, 세일하는 맥주들을 종류별로 신중하게 집어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서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세수를 하고 봉지와 맥주캔을 뜯고 음악을 들으면서 트위터를 켰는데 4월 27일, 오늘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날이자, 동시에 어떤 게임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statement를 공개적으로 올릴 것을 요구받은, 그러니까 한 쪽에서는 이념 논쟁 집어치우고 평화로 가즈아! 하고 있는데 여전히 노동을, 그것도 첨단의 테크놀로지와 궁극의 시각적 예술이 결합되어 있는 장르라는 게임 업계의 여성 노동자가 사상 검증을 당하는 일이 동시에 발생했던 날이란다. 과연 progress란 무엇인가. 민족주의, 공동체의 번영이라는 절대선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찬동이 평양 냉면과 대동강 맥주에 대한 열망과 결합하여 그 어느 때보다 여론을 뜨겁게 달군 오늘, 어떤 곳에서는 남초로 여겨지는 소비자 집단(실제로 게임 유저 중 여성의 비율도 상당할텐데, 어째서)이 혹은 여성의 목소리와 의견은 무시해도 되는 것이며 이에 반발할 경우 밥그릇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신변에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라는 점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당당히 천명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집단의 알력에 의해 자신의 생각이 검열 받는 것을 거부하는 여성 노동자가 곤경에 처한다. 디스토피아는 북한에만 있는게 아니네! 하는 생각.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가 또 달아나는 하루. 이를 기록한답시고 이렇게 주절주절 적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이것들이 쌓이면 혹시 무언가가 될지도 몰라, 하는 기대와 함께 이렇게 흔적을 남긴다. 이 혼란스런 일기를 쓰면서 슈퍼에서 사온 500ml 여섯 캔 중 네 캔을 해치워버렸다. 꼬북칩을 주워먹는 내 젓가락질이 (과자를 손으로 집어먹으면 컴퓨터를 하는데 번잡스럽기 때문에 젓가락을 쓰면된다!) 다섯번에 한번쯤 과자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역시 취하는데에는 빨리 마시는게 최고야. 아이돌 영상이나 볼까하는 생각에 유투브에 접속했는데 자넬 모네의 따끈따끈한 영상이 떠있다! 이거 보면서 어둠 속에서 혼자 춤이나 추다 자야겠다. 내일은 뭘할까. 사실 할 일은 너무도 많지만, 그렇다면 무엇부터 어떻게 어디서 해야할까를 고민해야하지만. 일단은 취기가 어느 정도 올라오니 진창에 빠졌던 마음의 얼룩을 털어내고, 뜨뜻하게 숙면을 취하는 일만 남았다. 여름이 가까워져오니, 수면의 질이 형편없이 저하되는 것을 매일매일 느낀다. 잘자고, 잘 먹고, 잘 놀아야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나를 돌볼 수 있는건 오직 내 자신뿐.  아픈 것도 나, 토해내는 것도 나, 춤추는 것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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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듣는 노래는 뭐... 스밍 위주긴 하지만 그래도 블로그 휴면 풀려고 쓰는 글. 








Sufjan Stevens,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분에 알게 된 뮤지션. 영화가 그렇게 좋은지는 동의 못하겠고 내 OST는 인정하겠소. 그런데 이름 참 안 외워진다.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겠고. 









무도가 종영하지 않았다면 분명 무도 가요제의 넥스트 혁오로 픽 되었을것 같은 새소년. 뮤직 비디오마저 이렇게 멋지다니. 요새 보면 K팝의 미래는 인디신에 있는 것 같다.  







며칠 전에 우연히 라이브를 듣고 소소하게 흥했던 노래들을 몇 개 들어봤다. 음색도 가창력도 나쁘지 않은데 이 부족한 느낌은 뭘까... 곡 하나를 끌고 가기에는 목소리의 결이랄까, 톤이랄까, 이 부분이 조금 단조롭다는 인상. 그래서 그런가 솔로곡보다 듀엣곡이 훨씬 좋다. 로꼬가 까랑까랑하게 잘 치고 들어오네... 무수한 이들이 1가정 1에릭남을 외치는 이유는 너무 잘 알겠으니 목소리 조금만 더 개발해서 꼭 떴으면.







비긴 어게인 2는 ㄹㅇ킴이 아니라 에디킴이 갔어야 해...... OO킴류 중에는 너가 일류야. 






미스틱 가수들 거의 다 좋아하고 민서도 좋아하고 이 노래도 다 좋은데, 역시 이 노래를 계속 듣는 이유는 이제는 소식도 알 수 없는 김예림의 목소리가 아쉬워서. 민서의 씩씩함을 조금 덜어내고 그 자리에 김예림의 수줍음을 채워넣으면 정말 완벽할 것 같은데. 별개로 요새 하트 시그널이 그렇게 돌풍이라는데 짝짓기 쇼를 시청할 항마력 DNA는 내게 여전히 부재중. 






위너 컴백해서 너무 좋은데 떡밥이 라디오랑 음악방송 밖에 없다. 그래도 브이넥 니트 입은 승훈이 직캠은 내 광대 리프팅에 직빵이야. 심지어 축제에도 와주신다는데... 보러가면 나 진짜 인생 망할것 같은데 어쩌지. 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앓!!!!!!





*내 기준 메타몽 이쁜 착장 직캠





브이넥 + 반바지 + 뒤로 쓴 볼캡 조합인데 개인 직캠이 없어서 땅을 쳤던 영상. 






찍어주신 MBC 슨생님들 감사하고, 블랙 수트 입혀주신 코디 슨생님 감사해요.





센치해 반깐 승훈... 내 심장을 뚜들겨 패고 그렇게 저의 최애가 되셨습니다. 






착장, 메이크업, 춤, 표정, 악세서리, 라이브 모든 것이 다 완벽한데다 1초도 지루하지 않은 꽉 찬 퍼포먼스. 춤추는 너가 제일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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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전국 미세먼지 농도는 매우 짙었다.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여기는 기상청 예보에 의하면 그랬다. (...) 도화는 목, 교진, 포, 천, 골, 굴 등의 이름을 외웠고 각 도로의 특징과 이력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간명하게 요약해 세상에 전했다. 도화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법을 존중했다. 수사도, 과장도, 왜곡도 없는 사실의 문법을 신뢰했다. 이를테면 '내부순환로 홍제 램프에서 홍지문 터널까지 차량이 증가해 정체가 예상된다'거나 '올림픽대로 성수대교에서 승용차 추돌사고가 났으니 안전운행 하시라'와 같은 말들을. 더구나 그 말은 세상에 보탬이 됐다. 선의나 온정에 기댄 나눔이 아니라 기술과 제도로 만든 공공선. 그 과정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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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마지막 날 정말 오랜만에 읽었던 우리말 문장. 몸이 안좋아서 뜨신 라떼 한 잔 사먹자고 간 동네 단골 카페에 사람이 우글우글.

카페에 구비된 책무리에 새로 추가된 김애란 신간 단편집을 들고 매장 밖 벤치에 앉아 읽었다. 안에선 커피가 나온것도 모르고. 

빨리 다 끝내고 어디로든 혼자 여행가서 읽고싶은 책만 양껏 읽고 싶다. 


<<바깥은 여름>>이라던 책 제목은 사실 창 밖의 무더위와 매미 소리와 녹음을 함께 보자는 제목이 아니었다. 외려 김애란의 지난 여름들은 영영 바깥에만 머무르는, 내 안으로 스며들어 나를 덥히지 못한 채 흘러가버리는 계절들이었나 보다.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내리 읽은 세 편은 전부 무겁고 깊은 슬픔에 푹 절여진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하루종일 가을비가 내리는 오늘, 맨투맨을 처음으로 꺼내입었는데 그것도 모잘라 그 위에 후드 집업을 덧입었다. 그래도 춥다. 

여름은 저만치 가버린지 이미 오래고, 12월 26일 같은, 활력은 시들고 공기는 뿌연 날들이 점점 빠르게 가까워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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