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

우리는 같은 직업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똑같이 견디진 않아요.
방구석에 번지는 고요의 넓이.
쪽창으로 들어온 별의 길이.
각자 알아서 회복하는 병가의 나날들.

우리에게 세습된 건 재산이 아니라
오로지 빛과 어둠뿐이에요.
둘의 비례가 우리의 재능이자 개성이고요.

우리에게도 공통점이 있죠.
죽고 싶은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
우리 중 누군가는 분명 요절할 테지만
정작 죽음이 우리를 선택할 땐
그런 순간들은 이미 지나친 다음이죠.

버스 노선에 없는 정류장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볼 때의 어리둥절함.
그게 우리가 죽는 방식이라니까요.
보험도 보상도 없이 말이에요.

사랑? 그래, 사랑이요.

우리는 되도록 아니 절대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말아야 해요.
검은 수사학, 재기 어린 저주, 기괴한 점괘.
우리가 배운 직업적 기술이 사랑에 적용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지 않나요?

옛날 옛적 어느 선배가 충고했죠.
그대들이 만에 하나 사랑에 빠진다면
동백꽃이 지는 계절에 그러하길.
그것은 충분히 무겁고 긴 시간이라네.

간혹 우리 중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들려요. 
그러곤 아주 끔찍한 일이 생겼다는 뒷이야기도요.
우리의 사랑은 사내연애 따위에 비할 수 없어요.
버스 종점에 쭈그리고 앉아 영원히 흐느끼는 이.
이별을 하면 돌아갈 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이.
그 사람이 버림받은 우리의 처량한 동료랍니다.

노동? 그래, 노동이요.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
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
그가 경찰에게 몽둥이로 얻어터질 때
세 명의 피 흘리는 인간이 나타났다네요.
그중에 겨우 살아남은 이는 조합원이고 죽은 이는 햄릿이고
가장 멀쩡한 이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조차
못 외우는 초짜 배우였다네요.

남들이 기운차게 H빔을 들어 올릴 땐
저만치서 뒷짐을 지고 콧노래나 흥얼거리지만
우리는 사실 타고난 손재주꾼이랍니다.
공장 곳곳에 버려진 쇳조각과 페인트로
불발의 꽃봉오리, 반기념비적인 바리케이드,
죽은 동지들의 잿빛 초상화를 담당하는 건 언제나 우리 몫이죠.

우리는 큰 것과 작은 것 사이
이를테면 시대와 작업대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서 길을 잇고 길을 잃어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건 고통의 양을 줄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뭔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거라고요.
우리는 벤담의 공장에서 자발적으로 해고됐다고요.

우리는 이력서에
특기는 돌발적 충동
경력은 끝없는 욕망
성격은 불안장애라고 쓰고
그것을 면접관 앞에서 깃발처럼 흔들어요.
그리고 제 발로 문을 박차고 걸어 나오는 거에요.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지독히 외롭게.

우리의 직업 정신은 뭐랄까.
살고 싶다고 할까. 죽고 싶다고 할까.
아니면 조금 유식하게 해방이라고 할까.
네, 압니다. 알고말고요.
우리가 불면에 시달리며 쓴
일기와 유서는 지나치게 극적이라는 것을.

생존? 그래, 생존이요.

언제부턴가 우리의 직업은 소멸하고 있어요.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대체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는지.
모든 공문서에서 우리의 이름 위엔 붉은 X자가 쳐져요.

기억? 그래, 기억이요.

나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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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인의 세번째 시집, <<오늘은 모르겠어>>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주문. 시집을 소설처럼 읽는건 사실 좋은 독서방식이 아닐텐데, 나는 늘 그런식으로 읽어버린다. 두세번쯤에 다 읽어버리고, 한동안 버려두었다가 다시 펼쳐서 응, 이런게 있었던가? 하는. 어쨌든 이번 시집도 그렇게 읽었고, 아련한 비애와 쿡쿡 웃게 만드는 다정함이 공존하는 그의 시는 여전히 나에게 묘한 위로를 준다. 각자의 회복 속도를 존중하고, 일기와 유서의 지나친 드라마틱함을 결코 비웃지 않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해고된 사람들을 기꺼이 우리라고 부르고, 이들에게 벌어진 일들을 잊지 않으려 쓰고 또 고치는 시인. 낭독회 같은 이벤트도 하는 것 같던데, 못가는 내 처지야. 되짚어보니 M과 갔었던 낭독회가 벌써 6년 전이구나. 6년밖에 안 됐나. 6년이나 되었나. 그 6년은 어떻게 흘러갔나. 이런 생각하다보면 잠은 또 다 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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