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지 이제 며칠 째더라... 수업과 티칭, 녹초되기와 충전하기, 조바심 내기와 될대로 되라하기의 진자운동을 반복하던 주 단위의 톱니바퀴에서 쏙 빠져나온지도 이제 거의 한 달이다. 이러니 날짜 감각이 완전히 녹이슬어버렸지. 조금은 강박적으로라도 흘러가는 시간을 예리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다. 14일 수요일에 돌아왔고, 이틀 정도를 H와 같이 보냈는데 아... 좀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 여행의 막판, 체력인지 마음의 력인지 아니면 둘다인지 하여간 에너지가 바닥이 나버렸고 곧 앓아누울 거라는 예감이 온 몸으로 감지되었다. 결국 보리차와 감기약을 몸에 털어넣기 시작. 사나흘 간 하루에 열여섯시간씩은 잔 것 같다. 혼자 지내지 못했던 삼주 반 정도의 시간동안 통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으니, 그냥 그때의 수면 부족을 이렇게 메꾼다고 생각해야지.
*정확하게 뭘 하면서 먹고 살게 될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포트폴리오니 커리어니 그런 professionalization의 말들과 친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아는 사람들의 이름이 이제 어딘가에든 지면을 얻고 발언권과 권위를 갖는 사람으로서 가시화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조바심이 든다. 그런데 사실 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이름을 알리는"데 까지에는, 그러니까 남들보다 키가 커져서 눈에 띄고 선택받는 존재가 되기 까지에는 짧지 않은 시간의 노력과 성취물들로 이루어진 발디딤대를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기까지 써놓고 오랜만에 들어가본 페이스북에 잠깐 스쳐지나갔던 친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책을 냈고, 명석한만큼 자신의 유니크함을 고래고래 온 주변에 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좀 오래된 동창 한명이 아이를 출산했다는(산전 우울증과 산후 우울증에 대한 엄청난 넋두리를 곁들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책도 아이도 생산하지 않은(혹은 못한?) 나로서는 어느 쪽이든 신산하고 떫고 그렇다. 그래서 여기에라도 뭔가를 적어놓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 몇 년간 잠자던 블로그에 낑낑 재접속을 한 경위가 되겠다.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여기로 올 때 야심차게 들고온 새 노트에 며칠에 한번, 몇 주에 한번씩 만년필로 뭔가를 끄적거리기는 하지만, 열심히 살자는 내용도, 그것을 담는 언어에도 조금의 발전이 없다. 괴발개발 같은 글씨에 이거했다 저거했다 그러니 반성하자는 내러티브의 반복. 초등학생의 일기도 이것보다 낫겠다. 아니 초등학생 왜 무시해? 그리고 그들은 그림도 그리고 날씨도 적어넣으니 내 일기같은 끄적임들보다 정보값이 더 풍부하다. 정말로 매체가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걸까? 키보드로 타닥거릴 때 조금더 많은 말들과 생각에 나온다. J를 비롯한 꽤 많은 주변인들이 테라피의 일환으로 블로그 일기쓰기를 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걸까. 이미 글같은 것을 생산하는 행위는 손에 펜을 쥐고 종이와 접촉하는 일이 아니라 손가락을 움직이고 커서로 요리조리 자리배치와 편집을 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어찌됐든 이제부터는 여기에다가도 뭔가 기록을 남겨야지. 이게 디딤대가 바로 되어주지는 않을테지만, 디딤대를 만드는 습관과는 어떻게든 연결이 될터이다.
*에어컨이 빵빵한 사이언스 빌딩 로비에서 작업을 하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에 앉고보니 추워서 시퍼러진 배와 허벅지 주변으로 팬티와 청바지 자국이 너무 강렬하게 나있는 것을 보았다. 누가 책을 내고 애를 낳고 그게 뭐시 중한디? 아니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못한) 내 몸도 이렇게 늙고 낡아가고 있다. 색과 탄력을 잃어가는데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이 젠더 인클루시브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있는 나를 습격했다. 볼일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유리창 너머 청설모가 신기한 자세로 바닥에 엎드려있는 것을 보았다. 얘는 밖이 너무 더워서 저러는 건가? 이내 포로로하고 날듯이 사라진 그 친구의 활력과 민첩함이 새삼 사무쳤고,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차갑고 탄력없는 몸에 피를 돌게 하겠다고 감기가 다 나으면 가겠다고 미뤄두었던 운동을 가겠노라 결심했다. 거의 한 달만에 간 운동은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었다. 막판에는 거의 기다시피. 바닥에 하도 무릎을 털썩 털썩 떨어뜨려서 레깅스에 곧 구멍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쨌든 땀을 쏟고 온몸 구석구석에 피를 보내고, 레깅스 자국이 남았지만 이건 괜찮은 자국. 이 정도면 오늘 하루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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