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5일 토요일, 19:10. 집 앞 CGV.
- 히든 피겨스, 계속 봐야지, 만 하다가 이제서야 봤다. 영화에 대한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영화의 기본적인 만듦새는 평이하다고 느껴졌다. 하긴, 평이하다고 느낀것도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주인공이 세 명인 셈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끌고 가면서 무너지지 않고 엔딩 크레딧까지 무사히 도달하니 그것 자체가 이미 성취일지도.
- “알려지지 않은 숫자들”을 찾아내었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 (Hidden figures were figured out by hidden figures.) 영화 제목만으로도 줄거리 설명이 가능하며, 사실 이 제목 자체가 의미하는, 그러니까 소재 자체의 희소성이 이 영화를 견인하는 힘일 것이다. 흑인 여성 수/과학자들에 대한 영화라니. 그것도 1960년대에. 흑인 남성 퀴어 영화보다 100배쯤 귀한 소재다.
-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아무래도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의 장면들. 특히 두 장면이 좋았다. 첫번째는 아무렇지도 않게 IBM의 연결을 바로잡던 씬. 남성들이 정복하지 못한 기계의 전원을 켜는 것은 미리 포트란 언어를 공부한 도로시이며,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컴퓨터”로 일하는 동료 여성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교육시키고, 마침내 때가 오자 멋지게 진짜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행진한다. 두 번째는 '나 너한테 악감정 없어'라고 말하는 비비안(커스틴 던스트)에게 '넌 그렇게 믿고 싶겠지'라고 조용히 대꾸하던 부분. 자신 안의 인종주의를 들여다보지 않는 이들에게 날리는 우아하고 정중한 일격.
- 미국 백인 남성의 프라이드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는 메리(자넬 모네)의 전략은 흥미로우면서도 아슬아슬한 지점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 고장난 차를 고치고 있는 세 여성에게 다가오는 백인 경찰관. 그는 이 세명의 흑인 여자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빌어먹을 러시아 놈들”과 대항할, 미국의 희망인 나사에서 일한다는 걸 알자 태도가 슬쩍 바뀐다. 그의 태도가 바뀐걸 간파한 메리는 얼른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캐서린을 저지하고 그를 구슬려서 경찰차 뒤를 신나게 달린다. “Three negro women”이 백인 경찰을 뒤쫓고 있다고, 그것도 1961년에 말야! 라고 환호하는 메리.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에 흑인의 수강을 허락하지 않는 학교에서 엔지니어가 되는데 필요한 수업을 듣고자 법원에 청원하는 장면에서는 약간 기분이 복잡해졌다. 메리가 판사를 설득하는 전략은 백인 남성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방식이랄까. 도로시가 커스틴 던스트에게 정중하게 하지만 따끔하게 지적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판사에게 “니가 이 판결을 내리는 건 결국 너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일이야”라는 식이다. 판사님, 당신은 언제나 첫번째였고, 또 최고이며, 나에게 수강권을 허락하는 일은 당신의 가치를 높이는 작업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 전략은 결과면에서는 성공적이다. 메리는 결국 수업을 듣게 되니까. 하지만 메리의 재판을 담당했던 그 판사는? 과연 그가 메리 이후 유사한 사건을 맡게 될 때,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결정의 이유는 뭐가 될까?
- 이런 고민은 결국 영화가 갖고 있는 능력주의의 함정과도 연결된다. 이 흑인 여성들이 끝내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들이 그럴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캐서린(타라지 P. 헨슨)의 상사인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정말이지 얄밉게 나오는) 셸든 쿠퍼, 아니 폴 셰퍼드(짐 파슨스)에게 하는 말, “여기에는 천재들이 많고, 니 임무는 그 천재들 중에서도 천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그 천재로 하여금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일이야” 뭐 대충 이런 말인데. 캐서린이 일하는 방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흰 셔츠와 검은 넥타이를 맨 채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초리를 보내는 수십명의 백인 남성들 중 일부는, 분명 캐서린만큼 뛰어나지 않아도 운좋게 그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캐서린은 결국 천재 중에 천재였고, 그런 의미에서, 비록 흑인 여성이라는 이중의 꼬리표를 달고도, 어떻게든 두각을 나타낼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지점이 묘하게 껄끄러운 건, 최근 유나이티드 항공 사건을 둘러싼 반응들 중, “남성이며 전문직인데,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저런 취급을 받는다는게 충격적이지만, 남성도 못되고 전문직도 못되는 아시아인인 나는 과연 어떤 취급을 받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여성들의 의견을 읽고 매우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맥락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알랭 드 보통 또한 <불안>에서 현대인들의 불안을 야기하는 다섯 가지 원인 중 ‘성과주의’를 뽑았다. "If the successful merited their success, it necessarily followed that the failures had to merit their failure... Low status came to seem not merely regrettable but also deserved." 네, 저는 성과주의의 잣대에서 탈락한, 문과생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능력은 결국 미국의 이익을 공고히 하는데 쓰여지지 않는가. 다시 백인 경찰관이 도로시와 캐서린과 메리를 에스코트 해주던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보자. 이 경찰관이 이들의 직업을 알고 “나름 우대”해주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세 여성의 출근길을 에스코트함으로써 자신 또한 미국이 선취해야 할 우주 정복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과업 달성에 기여하는거라고 믿는 알량한 성취감과 애국심의 충족일게다. 하지만 미국 시민의 안전을 수호하는 경찰로서 그가 하는 일은 고작 차가 고장나서 곤경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지고 말대꾸를 한다며 면박을 주는 일. 소수자에게 있어, 유리천장을 뚫고 자기 실현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 실현되어야 할 평등, 그리고 부당한 검문을 당하지 않거나 혹은 비행기에서 피흘리며 끌려나오지 않는 일상의 안전과 기본적인 존중,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바보같은 질문이다.) 정리하자면, 이 세 여성들이 이뤄낸 업적은 정말이지 대단하지만, 그 업적이 궁극적으로 강화한 것은 무엇인가? Make America Greater than Russia? 아, 그리고 그들은 오바마의 후임자로 트럼프를 뽑았습니다…
- 숨겨진 숫자, 즉 로켓의 재진입 위치를 계산해낸 캐서린의 놀라운 업무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쓸모가 다하자 원래의 “컴퓨터”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원청업체에 파견나온 하청업체 직원은 결국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계약 종료가 되면서 원래의 신분으로 강등되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해리슨이 선물하는 진주 목걸이. 부정의한 시스템의 결손을 메꾸는 건 결국 그런 개인의 선의인걸까. (이 대목에서는 언뜻 장강명의 단편 <알바생 자르기>도 겹쳐지네) 그것마저도 능력이 엄청나게 좋아야 하고, 그 능력을 알아봐주는 상사를 만나야 한다는, 노력과 운의 확률이 서로 곱해진, 그러니까 더더욱 작아지는 확률에 기대야 한다니.
- 지워져 있던 흑인 여성 과학자들을 조망한다는 영화의 대원칙에 따라 1960년대 민권운동의 피튀기던 페이지들 또한 가볍게 스쳐지나간다. (메리의 남편이 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Freedom Riders의 테러 사건도 언급되는데, 이에 대해 메리는 애들이 이런걸 봐서 뭐가 좋냐는 식. 하지만 1965년 셀마 행진은 영화의 배경인 61-2년과 불과 3년 차이일뿐. 영화 <셀마>와 이 영화의 화면 톤만 비교해봐도 두 영화의 지향점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투표권의 행사를 방해하지 말라며 목숨을 걸고 행진했던, 기본권조차 피를 흘리며 얻어내야 했던 인종적 집단의 역사적 현실을 반추하는 영화. 그리고 능력있지만 그 존재가 지워졌던 개인들을 꾸준히 발굴해 내는 영화… 모두 다 필요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할리우드는 아시안 아메리칸이 주인공인 영화를 과연 언제 만들까? 만들기는 할까?
- Freedom Riders와 관련해서 하나 더 덧붙이자면, 케네디는 당시 테러 사건에 대한 뉴욕타임즈 1면의 보도를 보고 백악관에서 민권 이슈를 담당하던 보좌관에게 전화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Can’t you get your goddamned friends off those buses?” 그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바로 3주 뒤 흐루쇼프와의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자유와 평등을 누린다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소련한테 그 실체가 들켜서는 안되는 더러운 빨랫감 같은 것. 이러한 일화는 1960년대 민권 운동이 정치적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결국 냉전 시대의 라이벌인 러시아에 대한 미국 나름의 민주 체제 선전, 혹은 체제 미화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역사학자들의 해석과 연결되며, 이는 다시 앞에서 말한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 강화 작업에 복무하는 수단으로서의 능력주의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 그래도 영화가 선사하는 쾌감은 역시 멋지게 차려입은 흑인 여성이 흰 분필을 쥐고 당당하게 칠판에 수식을 적어내려가는데 있다. (그것도 몇 번씩!) 특히 프로토콜이 허락하지 않는 펜타곤 회의에 해리슨은 캐서린을 데리고 들어가면서 그녀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지만, 회의 중 그녀는 필요한 숫자를 대답해내지 못하는 폴 대신 입을 열며, 그런 캐서린에게 해리슨은 결국 분필을 건네준다. 그 시퀀스는, 그래서 해리슨이 화장실 표시를 때려부수는 장면보다 짜릿하다. (화장실을 때려부수는 것도, 삐딱하게 보면 결국 캐서린의 업무 시간 손실이 맘에 안들어서다. “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라는 대사는 남았다만.) 뭣보다 흰 분필... 프로이트적으로 해석하자면 캐서린이 실컷 쓰고나면 다 닳아서 조그매지는 것.
*하루에 수만판씩 바둑을 둔다는 AI의 이름을 유치원생도 다 아는 2017년의 관객에게, 영화가 선사하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어쩌면 사람=컴퓨터였던 시절일지도. 컴퓨터를 들이기 위해 문짝을 뜯어야 했던, 그리고 그 전원을 몇 날 며칠 켜지 못했던 그런 때가 불과 반 세기 전이었는데, 이제 컴퓨터는 다른 의미로 다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한 때 컴퓨터는 말그대로 계산하는 인간, Compute의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건만, 이제 그 컴퓨터는 인간의 지능을 흉내내어 바둑을 두고, 의학 진단을 하며, 법원 판결을 내리고, 소설까지 쓴다. 혼자서 3D 영화도 만들어내는 거 아냐 이러다가.
**영화 관련해서 찾아보다가 여성이 인간 컴퓨터로 일했던 역사는 나사 이전에도 있었다는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19세기 말, 하버드 컬리지 천문대(Harvard College Observatory)에서 여성들을 고용해서 천체 이미지 분류 작업을 시켰는데 그들은 남성들만큼이나 퍼포먼스가 좋았다고. 또 그 중에서 윌리아미나 플레밍(Williamina Fleming)이라는 여성은 만 개가 넘는 행성의 분류법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또 그 과정에서 백색 왜성의 존재를 처음 알아챈, spectrograph 분야의 개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세 배우를 위해서라도 앙상블 연기상 같은거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문라이트에 이어, 자넬 모네의 연기를 보는 게 특히 더 즐거웠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통해서도 자신이 아티스트로 지향하는 가치를 멋지게 실천하는 아이콘. 사실 이름만 알았지 음악은 그동안 거의 몰랐는데 영화보고 유튜브에서 찾아보다가 Q.U.E.E.N.이라는 엄청나게 멋진 비디오를 발견했다! 자넬 모네에 에리카 바두의 지원사격, 거기다가 마지막 랩은 정말이지 환상이다. 가사는 또 왜이리 멋져.
Categorize me, I defy every label
And while you're selling dope, we're gonna keep selling hope
We rising up now, you gotta deal you gotta cope
Will you be electric sheep? Electric ladies, will you sleep?
Or will you pr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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