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이 벌어졌고, 애도가 쉽지 않다.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일러준 말을 온몸으로 발버둥치면서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지는 중이다. 요가를 하고, 요리를 하고, 피아노를 치고, 일기와 편지를 쓰고. 모두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위다. 요가의 많은 동작은 손가락을 펴고 바닥에 단단히 붙이는 것을 요구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이 떠지면 거실에 매트를 펴고 아주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다가 동쪽으로 나있는 창을 보고 태양경배를 연습한다. 끈기가 없는 성격과 그렇게 좋게 타고나지 못한 신체의 협응력 때문에 발전이 더디지만, 어느 날 발가락을 굴리고 허벅지를 바닥에 닿지 않게 차투랑가에서 업독으로 이어지는 동작에 드디어 성공했다. 불안과 슬픔과 무력과 절망 가운데 가끔씩 찾아오는 기쁨과 희열과 성취의 순간. 씹고 넘기기에 제법 힘이드는 채소들을 토막내고 채썰어서 차곡차곡 냉장고를 채운다. 손끝이 주황색으로 물들만큼 당근을 먹고 아삭아삭 소리로 내 고막을 채우기 위해 셀러리를 씹다보면 턱이 아프다. 20+@년만에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을 다행히 발견했다. 얼마나 행운인지. 조율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다. <괴물>의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로 시작했고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새로 건설해 나가야 할 삶의 각본은 과연 무엇일까?), 베이직 중의 베이직인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로 넘어갔다. 또랑또랑한 박자에 맞춰 왼손과 오른손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알레그로를 지키지는 못해도 스타카토와 트릴, 피아노와 포르테를 흉내내면서 손목과 손가락 끝에 힘을 풀었다 놓았다 하다보면 한 시간도 훨씬 넘는 시간이 훌쩍 흐른다. 등받이가 없는 딱딱한 의자 때문에 엉덩이가 얼얼하고 허리가 뻐근해진 것을 느끼며 연습실을 나온다. 며칠 전에는 일기장을 뒤적여보다가 이 곳에 와서 1년 반 동안 쓴 일기보다 최근 2달여 간 동안 쓴 일기가 더 많음을 깨달았다. 하루종일 나를 어떻게 몰아쳤는지를 적어내려간 뒤, 비슷한 말들의 행렬로 마무리되는 엔트리들. 그 선두는 대체로 이렇다. 슬프다, 화가 난다, 어떻게 해야할까, 울었다, 울고싶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한번은 텅 빈 길에서 소리를 진짜 질렀다. 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 잠을 자고 싶다, 얕은 잠을 잤다, 꿈을 꿨다. 쏟아진 혼란의 말들은 이내 이것을 매만지는 범박한 말들의 반복으로 마무리 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다 괜찮아질거야. 밤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등등. 기도처럼, 주술처럼, 몇 번을 반복해서 적고 소리를 내어 읽는다. 편지와 메일을 많이 쓰고, 보내고, 보내지 못한 말들은 지우고 찢었다. 단시간에 적어내려간 것도 있고, 며칠을 울면서 쓰기도 했다. 몇 달을 주저했던 메일을 보낸 뒤 다정한 답신을 받고나서는, 오랜 시간 주저했던 내 마음이 다 불필요했음을 깨닫고, 앞으로 좀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쓰고 싶은 마음이 들면 지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물론 아직도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짧은 기쁨과 긴 슬픔이 아주 단단하게 뒤섞이고 엉켜있는 겨울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타래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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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는 요새의 나를 이렇게 분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가를 한다. 걷는다. 새를 본다. 피아노를 친다. 음악을 듣는다. 요리를 한다. 일기를 쓴다. 편지를 쓰고 부친다. (혹은 지우거나 찢는다.) 책을 읽는다. 전화를 건다. 술을 마신다. 심호흡을 한다. 

 

눈물이 난다. 화가 난다. 무력하다. 비관에 잠긴다. 충동이 든다. 

 

내가 주어인 말들이 한 편에 있다. 다른 한 편에는 내가 주어가 아닌, 그러니까 나를 찾아왔다가 떠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들이 있다. 이 양 편의 완벽한 분리는 불가능하지만, 한 편을 부지런히 실천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도록 그 벽을 두텁게 다지고 쌓아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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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동안 살이 4킬로 빠졌다. 까마귀(두루미) 자세를 몇 번 시도해보았다. 앞으로 고꾸라질 때 으악하고 외마디 비명이 나오지만, 다치지않으려고 놓아둔 쿠션에 그 소리가 묻힌다. 내 몸을 내가 들어올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한다. 이왕 이렇게 된거 조금 더 몸을 가볍게 만들고 동시에 힘은 더 기르고 싶다. 생각해보니까 이거 성공하면 나 잠깐 새가 되는거네. 까마귀든 두루미든, 모두 날개를 크게 벌리고 하늘을 나는 친구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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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발렌타인 데이. 아침부터 기분이 싱숭생숭했는데 계속 말을 거는 상대방. 애매한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은 상대가 먼저 무너진다. 나도 침울해진 상태로 티칭을 하러 갔다. 수업의 정식 첫 리딩인 "Crying in H Mart"를 읽고 와 의견을 나누는 날이다. 이니셜 리스펀스를 간단하게 디스커션 시키고, 돌아가면서 얘기한 내용을 듣고, 내가 텍스트에 대해 이런저런 렉처링을 한 뒤, 프롬트를 주고 exit ticket으로 라이팅을 시키는 구성. 세팅을 끝내고, 수업 시작을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애들 앞에서 인사말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황급히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데 J의 말이 떠오른다. "열여덟 살짜리 애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용기 있는 일 아니니." 웃음이 피식났다. 코로나에 걸려서 회복 중인 J에게 "해피 발렌타인! 몸은 좀 어때? 다 나으면 우리 또 만나"라고 메시지를 보내면서 진정을 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애들에게 내가 오늘 수업하다가 울어도 너무 놀라지마, 한국 음식이 잔뜩 나오고, 엄마와, 상실과, 애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하잖니, 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던지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원래도 이 텍스트를 읽을 때는 리딩하고 연결되어 있는 작은 간식을 퀴즈 식으로 준비해서 애들과 나누는데, 이날은 날이 날인만큼 초콜렛까지 얹었다. 두 쌍의 젓가락이 국수가락을 나란히 붙들고 있는 책의 커버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로운 해석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그걸 덧붙였다. 느리고 작지만 그래서 소중한, 깨달음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순간들. 수업을 하다가 결국 코끝이 시큰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애들이 눈치챘을까? 뭐 어때. 그렇게 티칭을 무사히 마치고, 곧바로 이어지는 수업을 무사히 듣고, 해가 다 졌고 바람이 너무 찼지만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제 밤. 한 학생이 메일을 보냈다. 수요일 수업 너무 좋았다고. 자기가 그날 기분이 안 좋았는데, 수업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며 고맙다는 메시지. 나도 고마워. 작고 사소한 제스처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새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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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내내 바람이 차갑고 매섭다. 봄은 쉽게 오지 않아.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거실 밖 창문을 보다가 뭔가 파랗고 동그란 것들이 그 사이를 부지런히 옮겨다니고 있음을 느꼈다. 벽에 붙여놓은 동네 새들을 그려놓은 포스터를 재빠르게 훑어서 그 친구들의 정체를 파악한다. Eastern bluebird구나. 실내복을 입은 채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나간다. 극성맞은 청설모들 때문에 자꾸 자리를 옮기는 파랑새들의 사진을 멀리서나마 찍고, 얼어붙은 손가락을 비비고 온몸을 떨면서 집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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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고,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컨티뉴엄과 그물망에 위치해있음을 깨닫는 에피파니의 순간들. 우연히 접한 텍스트나 음악, 글을 파고 들어가다가 그것이 내 삶의 어떤 지점과 다시 만나는 연결점을 발견할 때. 그러니까 지난 학기에 그냥 흥미로 빌렸던 오래된 책에서 페이퍼에 써도 될만한 작가를 발견해서 꾸역꾸역 뭔가를 써서 냈는데, 그 작가를 다시 이번 학기 수업에서 정식으로 만난다던가. 예전에 읽고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뒀던 어떤 책의 이름과 저자가 갑자기 간절해졌지만 키워드 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이틀을 고생하다가, 드디어 다시 찾게 되었고, 마침 그 작가의 새 책이 2월 말에 출간된다는 것.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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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카페에서 이 긴 일기를 쓰고 있는데 P가 저쪽에서 인사를 한다. 꼭 끌어안고 안부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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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차의 새 학기, 첫 주, 캠퍼스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몇 달 간 텅 비어있던 동네와 학교에 갑자기 넘실대는 사람들과 소음들의 버거움이 엄청났고, 물러가기 싫은 여름의 마지막 심술인지 엄청나게 지글거렸던 최근 며칠의 더위 때문에 자기 소개와 실라버스를 뒤적거리고 끝나는 가벼운 수업들만 있었는데도 금방 지쳐버렸다. 운동을 잘못해서 아킬레스건이 쑤시는 왼다리를  질질 끌며 집에 걸어가는 길, 동네 고등학교 앞 잔디밭에서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다. 학교 대항전 같은데 좀처럼 할 것 없고 볼 것 없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것도 큰 이벤트인지, 선수들의 학부모와 친구들보다는 훨씬 더 많아보이는 사람들이 경기장을 둘러싼 트랙에 철푸덕 앉아서, 아니면 타월을 깔거나, 각자가 갖고온 캠핑 의자, 알루미늄 간이 스탠드에 앉아서 버건디 저지를 입은 선수들에게 “Go Amherst!”를 외치며 응원을 하고 있다. 얼마만에 직관하는 축구 경기인가. 나도 슬그머니 스탠드의 빈 끝에 자리를 잡는다. 반대편 전광판을 보니 홈 팀이 1:0으로 끌려가고 있고 전반이 15분쯤 남았다. 이 15분 동안 나는 내가 앉아있는 사이드에서 가까운, 홈팀의 오른쪽 풀백을 맡고 있는 17번 선수의 이름이 브라이언이라는 것(Way to go, Brian!), 홈팀의 이름은 허리케인이며(Let’s go Hurricane!), 캐칭이 불안한 허리케인의 골리는 로비(Focus, Robbie!), 원정 팀의 득점은 전반 이른 시간 세트피스 플레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It was very early into the game and they started at the left corner…) 차례로 배운다. 이 동네 2년차 거주민으로서 옆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홈팀의 플레이마다 박수를 보냈지만 원정팀이 조금 더 우세해 보이긴 한다. 개인기가 좋은 선수들은 홈팀이 분명히 많은데 원정팀의 피지컬이 전반적으로 더 다부지고 무엇보다도 제일 눈에 띄는 건 키퍼 차이. 원정 팀 키퍼는 커버 범위가 거의 노이어급이고, 펀트 킥이 날아가는 궤적도 제법 날카롭다. 자기네들끼리 스페어 볼을 갖고 노느라 아웃된 공을 잽싸게 주우러 가지 않는 볼보이들의 피부색은 피프티 셰이드 오브 브라운 앤 블랙이고, 관중들이 있는 트랙 군데군데에 송아지만한 개들이 털이 수북한 목덜미를 긁어주는 주인의 손길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누워있다. 점수 변화 없이 전반이 끝난다. 하프 타임이 되자, 남의 집 문을 두드려서 사탕을 얻어내고 길가에 레모네이드 스탠드를 차려 용돈을 버는 게 이 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유년기 통과의례임이 다시금 확인된다. 변화하는 몸에 한창 적응중인 십대들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긴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땋아내린 주근깨 소녀들이 작은 과자봉지 꾸러미를 들고 1달러라고 외치며 돌아다니는데, 애들만 그러는게 아니라 볼캡을 쓴 덩치좋은 아저씨까지 얼음이 가득한 아이스박스를 가뿐하게 옆구리에 끼고 망고와 딸기, 코코넛 맛의 하드를 2달러에 판다. (아저씨, 벤모는 안되죠?)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조명탑에 불이 들어오고, 후반전이 시작한다. 휴식을 하고 나온 덕인지 아니면 라커룸 아닌 라커룸 토크가 매서웠는지 경기 템포가 빨라졌다. 홈팀이 열심히 몰아치다가 차단당한 공을 우당탕탕 원정팀이 전진시킨다. 전반부터 불안했던 로비가 결국 실책성 플레이를 범한다. 내 옆에서 모든 패스와 모든 킥과 모든 스로인마다 파이팅을 불어넣던 백인 할아버지는 홈팀의 골망이 흔들린 줄 모르고 “Good defense”라고 환호하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이제는 2:0. 그러나 버건디 소년들이 영패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뿜어내기 시작하고 이에 홈팀 팬들도 더 가열찬 응원을 보탠다. 결국 돌파하던 홈팀의 공격수가 상대 골문 앞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가면서봐도 명백한 파울을 얻으며 드라마틱하고 아티스틱하게 쓰러진다. 레프리가 휘슬을 불며 골대를 향해 손을 쭉 뻗는다. 이번에도 옆자리 할아버지는 페널티킥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두근두근, 나를 포함해 스탠드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멀리서 보던 아이들도 갑자기 두손을 모은 채 필드 가까이로 모여든다. 골! 키커가 성공하자 모두가 즐겁다. “You got this!” “One more!” 할 수 있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다시 쏟아진다. 경기장의 데시벨이 올라가자 얌전했던 견공들 중 한 녀석이 갑자기 멍멍, 하고 내질렀고 여기에 그의 친구들이 화답하면서 소리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분위기를 넘겨주지 않으려는 원정팀이 다시 밀고 올라가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우리의 수문장 로비가 또 공을 제대로 처리못했지만 주장 완장을 찬 4번이 골라인 바로 앞에서 간신히 공을 걷어내고 쓰러진다. 동료들이 달려가 등을 두드리고 일으킨다. 이후 리드하고 있는 팀이나 따라가려는 팀 양쪽에서 쥐가 나서 몇 번 드러눕더니 경기가 끝난다. 홈팀의 2:1 패배로 마무리. 졌잘싸의 격려를 주고 받으며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진다. 발목과 어깨가 갑자기 가렵다. 눈으로 공을 쫓고 박수를 보내던 동안의 희미한 소속감에 별안간 낯설음과 외로움이 스민다. 이 정겹고 즐거운 풍경을 담아보겠다고 랩탑의 메모장을 켜서 부지런히 여기까지 썼으나, 내 주변의 아무도 화면에 계속 생성되고 있는 이 긴 글자들의 행렬을 해독할 수 없다. 물론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신나게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기도 하지만. 눈인사를 하고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기뻐하고 탄식하면서도 스몰토크를 나누지 않은 채 남들이 알지 못하는 네모둥그런 덩어리들을 타닥타닥 빚어내는 행위에는 분명 고독한 쾌감이 있다. 이렇게 내 안에 새겨지는 감정을 이방인의 감각이라고 해도 될까? 이만하면 2년차의 첫 주를 마무리하기에 제법 그럴듯한 감상같다. 가방을 둘러매고 다시 집으로 간다. 내일부터 기온이 다시 조금씩 내려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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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일요일. 

 

- 인스타에 그런 계정이 있다. 뉴욕 거리에서 지나가는 남녀를 붙잡고 Are you guys a couple?하고 묻는. 어떻게 만났냐는 후속 질문이 나오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어떤 아시안 커플이 나오는 릴스를 H가 공유해주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악세사리와 옷차림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도 정기적으로 손질받는 것이 300% 확실한 헤어를 하고 있었으며, 99%의 대답을 여자가 했다. 보통은 인터뷰이가 처음 만난 이야기를 마치면, 진행자의 다음 질문은 상대방에 대해서 가장 좋아하는 점이 뭐냐는 것인데, 이 컨텐츠에서는 뜬금없이 In-Yun이 뭔지 아냐는 질문이 나왔다. 여자는 Of course, I am Korean 하면서 또 대답을 술술. 갑자기 이 질문은 뭐지? "이거 너무 광고 느낌나는데?"하고 답을 하는 찰나 J의 인스타에 #pastlives라는 캡션이 달린 게시물이 올라왔다. "J야, past lives 이거 밈이야? 비슷한 컨텐츠가 갑자기 많이 보여" "아, 이거 영화에요!" 그렇구나. 찾아보니 코리안아메리칸 여성 감독의 영화다. A24가 제작했고 유태오가 나온다네? 마침 동네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H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거 인연 어쩌구 하는거 past lives라는 영화에서 나오는거 같아. 찾아보니까 동네에서 상영하는데 주말에 보러갈래?"

 

- 점심부터 몰아치던 비바람이 집을 나서기 직전 말끔하게 잦아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고 극장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리기 직전 다시 시작된 비와 바람의 콜라보. 우산으로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에서 딱 서른 걸음 정도를 걷고나니 온몸이 다 젖었다. 으슬으슬 떨며 축축한 채로 극장에 입장. 

 

- 서로에게 어린 시절의 스윗하트였던 노라와 해성이 노라의 이민으로 헤어졌다가 성인이 되어 재회한다는 큰 틀에 따라 영화는 흘러간다. 피날레에서도 극적이고 열정적인 재결합의 카타르시스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잔잔하고 소박한 종결을 내놓는다. 사실 이 둘의 재회는 근본적으로 닝닝한 탄산수 같을 수 밖에 없는게 태평양을 사이에 둔 각자의 다른 시공간이 결국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어린 시절 공유한 추억으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두 인물의 재회가 일어나는 물적 조건과도 그대로 일치하며, 따라서 첫번째 reconnect는 온라인, 두번째이자 최종적인 물리적 재회가 일어날 때 쯤에 노라는 이미 기혼이 된다.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은 했으나, 딱히 감정적으로 감흥이 일어나거나 영화의 중심인 노라 캐릭터에 몰입이 되지 않았는데, 그건 이 영화가 애초에 타겟하고 있는 사람이 나처럼 이주의 경험 없이 성장과정을 거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유태오 캐릭터가 그나마 나와 비슷할텐데, 어쨌든 영화는 노라를 제외한 캐릭터를 거의 빌드업하지 않는다) 노라와 태성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초반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읭? 하는 질문이 떠다녔는데, 한국 나이로 열두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남녀 아이들이 저렇게 순수하고 솔직하게 교류한다고? 아닌가 예전에는 저랬나? 낭만화되다 못해 거의 sterilized 된, 비현실적 묘사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20대 이후에 노라의 삶이 흘러가는 부분부터는 그냥 감독 자신의 삶을 가져다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부분이 묘하게 걸리적거렸다. 예술가를 꿈꾸는 동아시아 이민 1.5세대 여성으로서 감독이 밟아왔던 인생의 궤적이 예측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으로 간명하게 훑어지는데, 이 "훑어지는" 내용과 방식을 자꾸 곱씹게 되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노라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거치는 고민이나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으며, 이러한 부분을 보여주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떻게 보면 완전히 성장한 노라라는 인물의 설정값을 보여주고 거기까지 이야기를 전진시키는데에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포커스는 어디에 가 닿아있는지를 다시 질문하게 되고... "인연" 그걸 그리기 위한거야?) Playwright이 되고 싶다는 꿈에 따라 뉴욕으로 이주하고, 특정한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고, 그 과정에서 만난 동료 남성(미국인이고 백인이다)과 결혼하고... 노라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은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혹은 검증된(tried-and-true) 과정들을 차례로 밟아나가는(아직도 가장 whitish한 예술창작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코 연극계일 것이다), 주변부 출신의 마이너리티 여성이 내릴 법한 삶의 결정들에 대한 보편화된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기대고 있는 이같은 자전성과 전형성의 손쉬운 교환 혹은 등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관계 안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오래된 길항의 축 위에서 알맞은 균형점을 찾고 그 고유한 위치성을 미학적으로 재현하는 노력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전형성 때문에 영화는 차라리 1.5세대에 대한 Ethnography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코리안 아메리칸, 혹은 다른 hyphenated identity의 소유자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또 내가 미적지근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추정. 

 

- 아시아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어떤 경향성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 중 하나는 modesty가 아닐까. 혼종성과 과잉의 기치를 전면화 하면서 장르 영화의 전통과 문법에 대한 이해를 각자의 방식으로 비트는 영화들이 컬트적으로 소비되는 한켠에는 (출산을 하기 전)곤도 마리에의 얼굴이 대표하는 미니멀리즘처럼 야심과 에고를 제거한 소박한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채택한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도 후자에 속하는데, 이러한 절제와 단순함의 "갬성"이 어필하는 관객층이 누굴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에서 이상하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노라가 나중에 남편이 되는 인물을 처음 만났을 때 인연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주면서, 사실은 이거 한국 사람들이 "seduce"할 때나 하는 말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의도된 웃음포인트이면서 동시에 이 말을 내뱉는 노라와 이를 듣는 미래의 남편을 짝으로 묶어 이번 생의 연인으로 이들의 인연이 정의되는 순간. 그런데 이 대사는 마치 영화가 전생이나 인연이라는 말이 낯설게만 들리는 미국 관객을 "꼬시려는", 이 영화의 포지셔닝에 대한 메타 코멘터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인 Past Lives는 노라와 해성이라는 두 사람만의 관계를 이성애적인 것으로 국한하지 않으려는, 더 폭넓고 연속적인 관계성에 대한 작품의 지향을 암시하지만, 그 목표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으로 성취되는가? 영화에서 전생과 인연이라는 개념은 결국 이성애적 관계의 완성 혹은 실패(하지만 다음에의 기약이라는 가능성이 잔존하는)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만 이해되고 제시되고 있지 않는가. (이런 면에서 노라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태성과 남편만이 바에 남아서 "우리도 인연이다"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은 흥미롭지만 짧게 스쳐지나가며, 한편으로는 이 둘이 노라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인연이 된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관념조차도 페티시화 되어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이 너무나도 손쉬워진 시대, 지나치게 과시적이지 않아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계급적 안락함과 성공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소위 tasteful한 외양의 아시안 커플에게 past lives와 in yun을 물어가며 영화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숏폼 컨텐츠에 함의되어 있는 레이어들은 얼마나 무수한가. 영화는 시작하는 장면으로 노라의 양편에 해성과 미국인 남편이 앉아 있는 바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 셋의 대화 대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셋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유추하는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를 보이스 오버로 들려준다. 관객이라는 관찰자의 포지션과 관찰 대상의 구도를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시작은 (영화의 의도는 결코 아니었을) 결국 영화에서 전생과 인연이라는 관념이 신비롭지만 예쁘장하고 안전한 소비재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혐의와 맞닿아 있는것 같다. 

 

- 유태오는 평범한 한국의 엔지니어 회사원을 연기하기에는 너무 잘생겼고 가슴도 너무 빵빵하다. 

 

- 이 영화에서 절제되어 있는 다이얼로그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성인이 된 노라와 해성이 다시 만날 때, 둘이 보여주는 대화는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에서 그리는 남녀의 폭풍 수다(flirt와 learning이 혼합되어 있는)와 분명히 다르다. 새롭게 뿌리 내린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 K 장녀로서 부모님의 몫까지 의사소통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다 보니 노라의 한국어가 지워진걸까? 아무리 그래도 한국에서 그만큼 초등학교 다니고 갔으면 한국어를 그거보단 잘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자주 끊기고, 침묵이 많으며, 느릿느릿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skype의 배드 커넥션과 시차와 성장 배경으로 인한 언어적 능숙함의 차이로 이 메워지지 않는 틈이 생겼다고 봐야할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화가, 그리고 관계가 결코 끊기지는 않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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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부터 하나씩 뜨던 트레일러, 개봉을 코앞에 두고 공개된 라이언 고슬링의 솔로 발라드와 빌리 아일리시 뮤비를 그룹챗에서 공유해가면서 기다렸던 그 영화 바비. 개봉일이 겹친 놀란 영화까지 함께 묶어서 Barbenheimer라고 미디어에서도 잔뜩 뽐뿌를 넣었던 7월 21일 금요일. 때마침 한국은 중복이었고, 매주 각자의 집을 오가면서 나누는 친구들과의 식사를 호스팅 한지도 꽤 되어서 "영화 보고 우리집에서 한국에서 서머 푸드로 먹는 치킨 수프 먹자!"를 힘차게 제안. 아침에 수영을 하고, 집에 와서 국물이 넉넉하게 삼계탕을 끓이고 로메인 상추로 겉절이 할 준비까지 다 완료해놓고 4:45 상영 시간 시간에 맞춰 극장에 갔다. 어딘가에 하나씩은 핑크 아이템을 착장한 (나는 동생이 던져주고 간 마젠타 핑크 스크런치로 간신히 드레스 코드를 때웠다...) 사람들,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애들 무리, 십대쯤 되는 딸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등으로 로비가 북적거렸다. 이쯤되면 뉴진스의 하입보이가 아니라 그레타 거윅의 하입바비다. 

 

- 영화는 feel-good movie로서의 소임에 충실하다. 영화는 바비와 켄의 우당탕탕 인간 세계 탐방 버디 무비의 플롯을 따를 것이라는 내 예상에서 비켜나는데, 이러한 탈선은 바비와 켄이 각자의 awakening을 통해서 주체성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의 결말로 이어진다. 내가 느끼는 이 영화의 아쉬움은 사실 이러한 예상 및 탈선과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둘의 버디 무비가 될 것 같다는 예상은 영화가 개봉 직전까지 순차적으로 쏟아낸 트레일러를 시청한 결과인데, 문제는 트레일러 이상으로 영화가 인상적이거나 재미있는 순간을 담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모든 시퀀스들이 조금씩 루스하다는 인상이 들었는데, 이러한 느슨함은 마치 바비가 두려워하는 셀룰라이트처럼 점차 누적되어서 후반부에 가면 울퉁불퉁하고 어글리한 과잉을 낳는다. (윌 패럴의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가장 이 영화에서 디벨롭이 덜 된 캐릭터를 뽑는다면 만장일치로 그가 지목될 것. 그가 이끄는 검정 수트의 남자들은 플롯의 진행과 주제의 심화라는 양 측면에 거의 기여를 하지 못한다) 또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켄에게도 각성과 성장을 부여하는 영화의 큰 줄기는 "바비"라는 영화의 타이틀을 다시 써야 하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It's always Barbie, and Ken이라는 켄의 한탄이, 역설적으로 바비랜드와 영화 안에서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증언이 되어버린 셈. 쉽게 말해서, 켄의 솔로무대가 그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었을까? 바비들에게 부여되었던 전반부의 군무씬은 바비의 malfunctioning에 의해 짧게 끝나버리는 반면 켄들의 군무씬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플레이 아웃되며, 영화의 홍보 컨텐츠들을 충실하게 소비해왔던 입장에서 이 신은 너무 길게 느껴진다. 물론 트레일러와 선공개 장면들을 보지 않은 관객에게는 이 부분이 신선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켄의 존재론적 성찰을 이렇게까지 친절하고 충실하게 전면화 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언제나 켄 그 자체가 아니라 바비의 남자친구라는, 파생적인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열등감은 이미 바비와 분리되어 그가 벌이는 소동의 추동 요인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나 싶은데 거기에 캐릭터를 맡은 배우가 직접 노래하는 장면까지 몇 분간 넣어주니 영화의 추는 켄 쪽으로 확 기울어버린다.

 

- 더 큰 아쉬움은 영화가 보여주는 페미니즘이 납작하다는 데서 온다. 영화는 가부장제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희화화 하는 것만큼이나 페미니즘의 의미와 표현을 사소화 한다. 바비들이 어떻게 세뇌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재하고(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바비들이 세뇌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되돌리는 것 또한 너무 쉽고 허망하다(얼굴 붙들고 스피치 한번 하면 끝?!). 크게 공들여 설명되지 않고 그저 플롯의 진행으로서만 어물쩡 넘어가는,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이라는 서로 대척하는 이데올로기적 레짐의 손쉬운 전환은 결국 바비랜드라는 설정의 인공성과 허구성에서 비롯된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억압성과 한계를 노출하고 격파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결국 구조와 시스템, 정치의 문제인 것에 비해 영화가 플롯의 대단원에서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각성과 선택이다. 영화의 이같은 페미니즘 101적인 결말은 personal is political을 부르짖었던 초기 세컨 웨이브 페미니즘의 한계와 공명하는 것은 아닌지. 1959년에 태어난 바비를 2023년의 감각으로 재포지셔닝 한다면, 적어도 60년대 수준의 논의보다는 더 다층적인 이야기를 담아야 하지 않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한계는 결국 바비라는 IP를 새롭게 브랜딩해서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바비 유니버스의 플라스틱 가공물을 팔기 위한, 마텔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출발과 무관하지 않다. 지갑으로 키운다는 말에 함의되어 있는 소비주의의 위험성에 특히나 더 민감한 사람으로서 영화에서 가장 아이러니하고 웃긴 대사는 Mattelfucker가 된다. 

 

- 4:45 영화가 시작한 시간은 5:06이었는데, 이 말인 즉슨 20분도 넘게 어처구니 없는 다른 영화들의 광고를 견뎌내야 했다는 것이다. 과연 저만큼의 자본을 들여 저런 서사를 생산해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의 트레일러들이 한없이 이어지자 친구들과 손목을 탁탁 짚어가며 눈알을 굴렸다. 풍부한 대화와 다채로운 감정을 일으켜주는 좋은 대중 영화를 만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참 어려워졌다. 다수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안전한 내용과 검증된 양식만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매체만이 선사할 수 있는 정서적, 감정적 고양의 경험이 너무 귀해졌다. 아님 그냥 내가 늙고 불평만 많아진 걸까. 

 

- 말그대로 통닭인데 잘 발라먹을 수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 무색할만큼 친구들은 그릇에 코를 박고 삼계탕을 먹었고, 국물까지 싹싹 비워주었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집이 덥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비가 와서 더위가 가신 덕에 선풍기만 돌렸는데도 모두가 쾌적하고 즐겁게 밤을 보냈다. 이렇게 중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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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의 화두는 quality sleep이다. 빛과 소음과 습도와 온도가 통제된 공간에서의 수면이 너무 간절하다. 에어컨이 없으니 꼼짝없이 창문과 블라인드를 열어놓고 자야하는데, 아침 네 시가 좀 안되면 건물 3층 코너에 위치한 침실을 에워싸고 있는 무성한 나무에서 새들의 힘찬 모닝 컨퍼런스가 시작되고, 방 안 세 곳의 창문 중 머리맡 창문은 하필이면 또 동향이어서 다섯 시면 이미 방이 환하다. 물에 빠지거나 샤워를 하는 축축한 꿈을 꾸다가 땀에 젖은 채 잠이 깨고, 타이머가 없는 멍텅구리 선풍기를 켜놓고 다시 잠을 청하면 두어 시간 뒤에 온몸이 뻣뻣해진 채로 기상한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학생회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학교에서 어떤 친구를 만났다. 안부를 묻는 그에게 수면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더니 센트럴 AC가 되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안 쓰게 된 윈도우 유닛을 선뜻 주겠다고 한다. 역시... 선한 청년이었어. 저녁 때 집으로 가져다 주고 심지어 설치하는데 필요한 각종 소모품까지 사서 오겠다고. 7시 반이 조금 넘어서 왔는데 저녁을 안 먹었다길래 집 앞에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먼저 하기로. 먹다보니 호구조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그가 외동이며 엔지니어링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혹시 랜덤한 레고 조각들이 들어있는 상자만 건네주면 하루 종일 혼자서도 잘 노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나요, 라고 물어보니 오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도 레고맨이었군요.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딱 그랬답니다. 이런 얘기를 나누며 배를 채우고 다시 집으로 컴백.

 

*박스를 뜯고 나온 에어컨은 크기는 작았지만 침실을 쿨링하기에는 충분한 사이즈.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마저도 반가웠다. 에어컨을 고정하고 방충망을 빼낸 창문의 틈새를 메우는데, 나는 당연히 테이프로 막아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던 구석의 미세한 틈들을 레고맨은 남은 스펀지를 이용해 메우겠다고 했다. 그러면 저 좁은 틈에 밀어넣으려면 젓가락을 가져다 줘야 하나? 라는 의문을 머리에서 굴리고 있는데, 레고맨은 전동 드라이버의 드릴을 송곳처럼 썼다. 물건의 다면적인 용도를 발견하고 매끈한 피니시를 추구하는 레고맨들. 똥손인 나에게 없는 능력과 비전. 레고맨들은 곁에 두면 참 이로운 존재들이다. 피니시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감사의 음료와 후식을 대접하고 다음에 집에 초대하겠다는 인사를 나눈 뒤 에어컨을 돌린 채 씻고 몸의 물기를 대충 닦고 그 앞에 재채기가 나올때까지 서있었다. 

 

*충분히 침실을 쿨링했다고 생각하고 에어컨을 끄고 기분좋게 잠이 들었건만, 새벽에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달라붙은 채 또 깨버렸다. 에어컨을 보조할 수 있는, 타이머가 달린 성능 좋은 서큘레이터까지는 사야겠구나. 험난한 여름나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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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지 이제 며칠 째더라... 수업과 티칭, 녹초되기와 충전하기, 조바심 내기와 될대로 되라하기의 진자운동을 반복하던 주 단위의 톱니바퀴에서 쏙 빠져나온지도 이제 거의 한 달이다. 이러니 날짜 감각이 완전히 녹이슬어버렸지. 조금은 강박적으로라도 흘러가는 시간을 예리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다. 14일 수요일에 돌아왔고, 이틀 정도를 H와 같이 보냈는데 아... 좀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 여행의 막판, 체력인지 마음의 력인지 아니면 둘다인지 하여간 에너지가 바닥이 나버렸고 곧 앓아누울 거라는 예감이 온 몸으로 감지되었다. 결국 보리차와 감기약을 몸에 털어넣기 시작. 사나흘 간 하루에 열여섯시간씩은 잔 것 같다. 혼자 지내지 못했던 삼주 반 정도의 시간동안 통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으니, 그냥 그때의 수면 부족을 이렇게 메꾼다고 생각해야지. 

 

*정확하게 뭘 하면서 먹고 살게 될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포트폴리오니 커리어니 그런 professionalization의 말들과 친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아는 사람들의 이름이 이제 어딘가에든 지면을 얻고 발언권과 권위를 갖는 사람으로서 가시화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조바심이 든다. 그런데 사실 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이름을 알리는"데 까지에는, 그러니까 남들보다 키가 커져서 눈에 띄고 선택받는 존재가 되기 까지에는 짧지 않은 시간의 노력과 성취물들로 이루어진 발디딤대를 만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기까지 써놓고 오랜만에 들어가본 페이스북에 잠깐 스쳐지나갔던 친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책을 냈고, 명석한만큼 자신의 유니크함을 고래고래 온 주변에 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좀 오래된 동창 한명이 아이를 출산했다는(산전 우울증과 산후 우울증에 대한 엄청난 넋두리를 곁들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책도 아이도 생산하지 않은(혹은 못한?) 나로서는 어느 쪽이든 신산하고 떫고 그렇다. 그래서 여기에라도 뭔가를 적어놓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 몇 년간 잠자던 블로그에 낑낑 재접속을 한 경위가 되겠다.

 

*미국으로 오게 되면서, 여기로 올 때 야심차게 들고온 새 노트에 며칠에 한번, 몇 주에 한번씩 만년필로 뭔가를 끄적거리기는 하지만,  열심히 살자는 내용도, 그것을 담는 언어에도 조금의 발전이 없다. 괴발개발 같은 글씨에 이거했다 저거했다 그러니 반성하자는 내러티브의 반복. 초등학생의 일기도 이것보다 낫겠다. 아니 초등학생 왜 무시해? 그리고 그들은 그림도 그리고 날씨도 적어넣으니 내 일기같은 끄적임들보다 정보값이 더 풍부하다. 정말로 매체가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걸까? 키보드로 타닥거릴 때 조금더 많은 말들과 생각에 나온다. J를 비롯한 꽤 많은 주변인들이 테라피의 일환으로 블로그 일기쓰기를 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걸까. 이미 글같은 것을 생산하는 행위는 손에 펜을 쥐고 종이와 접촉하는 일이 아니라 손가락을 움직이고 커서로 요리조리 자리배치와 편집을 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어찌됐든 이제부터는 여기에다가도 뭔가 기록을 남겨야지. 이게 디딤대가 바로 되어주지는 않을테지만, 디딤대를 만드는 습관과는 어떻게든 연결이 될터이다. 

 

*에어컨이 빵빵한 사이언스 빌딩 로비에서 작업을 하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에 앉고보니 추워서 시퍼러진 배와 허벅지 주변으로 팬티와 청바지 자국이 너무 강렬하게 나있는 것을 보았다. 누가 책을 내고 애를 낳고 그게 뭐시 중한디? 아니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못한) 내 몸도 이렇게 늙고 낡아가고 있다. 색과 탄력을 잃어가는데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이 젠더 인클루시브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있는 나를 습격했다. 볼일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유리창 너머 청설모가 신기한 자세로 바닥에 엎드려있는 것을 보았다. 얘는 밖이 너무 더워서 저러는 건가? 이내 포로로하고 날듯이 사라진 그 친구의 활력과 민첩함이 새삼 사무쳤고, 죽은 사람의 그것처럼 차갑고 탄력없는 몸에 피를 돌게 하겠다고 감기가 다 나으면 가겠다고 미뤄두었던 운동을 가겠노라 결심했다. 거의 한 달만에 간 운동은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들었다. 막판에는 거의 기다시피. 바닥에 하도 무릎을 털썩 털썩 떨어뜨려서 레깅스에 곧 구멍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쨌든 땀을 쏟고 온몸 구석구석에 피를 보내고, 레깅스 자국이 남았지만 이건 괜찮은 자국. 이 정도면 오늘 하루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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