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부터 하나씩 뜨던 트레일러, 개봉을 코앞에 두고 공개된 라이언 고슬링의 솔로 발라드와 빌리 아일리시 뮤비를 그룹챗에서 공유해가면서 기다렸던 그 영화 바비. 개봉일이 겹친 놀란 영화까지 함께 묶어서 Barbenheimer라고 미디어에서도 잔뜩 뽐뿌를 넣었던 7월 21일 금요일. 때마침 한국은 중복이었고, 매주 각자의 집을 오가면서 나누는 친구들과의 식사를 호스팅 한지도 꽤 되어서 "영화 보고 우리집에서 한국에서 서머 푸드로 먹는 치킨 수프 먹자!"를 힘차게 제안. 아침에 수영을 하고, 집에 와서 국물이 넉넉하게 삼계탕을 끓이고 로메인 상추로 겉절이 할 준비까지 다 완료해놓고 4:45 상영 시간 시간에 맞춰 극장에 갔다. 어딘가에 하나씩은 핑크 아이템을 착장한 (나는 동생이 던져주고 간 마젠타 핑크 스크런치로 간신히 드레스 코드를 때웠다...) 사람들,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애들 무리, 십대쯤 되는 딸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등으로 로비가 북적거렸다. 이쯤되면 뉴진스의 하입보이가 아니라 그레타 거윅의 하입바비다. 

 

- 영화는 feel-good movie로서의 소임에 충실하다. 영화는 바비와 켄의 우당탕탕 인간 세계 탐방 버디 무비의 플롯을 따를 것이라는 내 예상에서 비켜나는데, 이러한 탈선은 바비와 켄이 각자의 awakening을 통해서 주체성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의 결말로 이어진다. 내가 느끼는 이 영화의 아쉬움은 사실 이러한 예상 및 탈선과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둘의 버디 무비가 될 것 같다는 예상은 영화가 개봉 직전까지 순차적으로 쏟아낸 트레일러를 시청한 결과인데, 문제는 트레일러 이상으로 영화가 인상적이거나 재미있는 순간을 담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모든 시퀀스들이 조금씩 루스하다는 인상이 들었는데, 이러한 느슨함은 마치 바비가 두려워하는 셀룰라이트처럼 점차 누적되어서 후반부에 가면 울퉁불퉁하고 어글리한 과잉을 낳는다. (윌 패럴의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가장 이 영화에서 디벨롭이 덜 된 캐릭터를 뽑는다면 만장일치로 그가 지목될 것. 그가 이끄는 검정 수트의 남자들은 플롯의 진행과 주제의 심화라는 양 측면에 거의 기여를 하지 못한다) 또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켄에게도 각성과 성장을 부여하는 영화의 큰 줄기는 "바비"라는 영화의 타이틀을 다시 써야 하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It's always Barbie, and Ken이라는 켄의 한탄이, 역설적으로 바비랜드와 영화 안에서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증언이 되어버린 셈. 쉽게 말해서, 켄의 솔로무대가 그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었을까? 바비들에게 부여되었던 전반부의 군무씬은 바비의 malfunctioning에 의해 짧게 끝나버리는 반면 켄들의 군무씬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플레이 아웃되며, 영화의 홍보 컨텐츠들을 충실하게 소비해왔던 입장에서 이 신은 너무 길게 느껴진다. 물론 트레일러와 선공개 장면들을 보지 않은 관객에게는 이 부분이 신선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켄의 존재론적 성찰을 이렇게까지 친절하고 충실하게 전면화 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언제나 켄 그 자체가 아니라 바비의 남자친구라는, 파생적인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열등감은 이미 바비와 분리되어 그가 벌이는 소동의 추동 요인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나 싶은데 거기에 캐릭터를 맡은 배우가 직접 노래하는 장면까지 몇 분간 넣어주니 영화의 추는 켄 쪽으로 확 기울어버린다.

 

- 더 큰 아쉬움은 영화가 보여주는 페미니즘이 납작하다는 데서 온다. 영화는 가부장제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희화화 하는 것만큼이나 페미니즘의 의미와 표현을 사소화 한다. 바비들이 어떻게 세뇌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재하고(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바비들이 세뇌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되돌리는 것 또한 너무 쉽고 허망하다(얼굴 붙들고 스피치 한번 하면 끝?!). 크게 공들여 설명되지 않고 그저 플롯의 진행으로서만 어물쩡 넘어가는,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이라는 서로 대척하는 이데올로기적 레짐의 손쉬운 전환은 결국 바비랜드라는 설정의 인공성과 허구성에서 비롯된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억압성과 한계를 노출하고 격파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결국 구조와 시스템, 정치의 문제인 것에 비해 영화가 플롯의 대단원에서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각성과 선택이다. 영화의 이같은 페미니즘 101적인 결말은 personal is political을 부르짖었던 초기 세컨 웨이브 페미니즘의 한계와 공명하는 것은 아닌지. 1959년에 태어난 바비를 2023년의 감각으로 재포지셔닝 한다면, 적어도 60년대 수준의 논의보다는 더 다층적인 이야기를 담아야 하지 않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한계는 결국 바비라는 IP를 새롭게 브랜딩해서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바비 유니버스의 플라스틱 가공물을 팔기 위한, 마텔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출발과 무관하지 않다. 지갑으로 키운다는 말에 함의되어 있는 소비주의의 위험성에 특히나 더 민감한 사람으로서 영화에서 가장 아이러니하고 웃긴 대사는 Mattelfucker가 된다. 

 

- 4:45 영화가 시작한 시간은 5:06이었는데, 이 말인 즉슨 20분도 넘게 어처구니 없는 다른 영화들의 광고를 견뎌내야 했다는 것이다. 과연 저만큼의 자본을 들여 저런 서사를 생산해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의 트레일러들이 한없이 이어지자 친구들과 손목을 탁탁 짚어가며 눈알을 굴렸다. 풍부한 대화와 다채로운 감정을 일으켜주는 좋은 대중 영화를 만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참 어려워졌다. 다수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안전한 내용과 검증된 양식만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매체만이 선사할 수 있는 정서적, 감정적 고양의 경험이 너무 귀해졌다. 아님 그냥 내가 늙고 불평만 많아진 걸까. 

 

- 말그대로 통닭인데 잘 발라먹을 수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 무색할만큼 친구들은 그릇에 코를 박고 삼계탕을 먹었고, 국물까지 싹싹 비워주었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집이 덥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비가 와서 더위가 가신 덕에 선풍기만 돌렸는데도 모두가 쾌적하고 즐겁게 밤을 보냈다. 이렇게 중복 끝.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Past Lives>  (0) 2023.08.02
Justin Peck's Choreography  (0) 2019.02.19
<히든 피겨스>  (0) 2017.04.18
<밤의 해변에서 혼자>  (0) 2017.04.05
<문라이트>  (0) 2017.03.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