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지금 뭘하고 계세요.

제가 없는 가을은 쓸쓸하지 않나요.

슬프지 않나요.


전에 제가 달리는 차 속에서 당신께 불러드린 노래 기억하나요.

너무 바삐 이별하느라 못한 말이 있어요.

사랑해요.


일산에서, 이소라. 




--------------------------



막바지 폭염은 당최 끝날듯 끝나지를 않고, (오늘도 36도였다니...)

8월 초에는 오히려 태우겠다고 땡볕에 잘만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더위를 먹었나, 우울과 무력이 요새 또 도져서 큰일이다.

차가운 바닥에 하루종일 누워서 눈을 감았다 떴다만을 반복.

그래도 이럴 때 이소라 노래를 듣다보면 그녀의 압도적인 슬픔과 분노에 내 감정이 누그러지는듯 하다. 


앨범 버전은 좀 재지한 느낌이 있는데, 

이 라이브 버전은 본인이 직접 썼다는 저 엽서 때문인지 좀더 메마른 슬픔이 느껴진다. 


이렇게 곱게 부르는 초기 노래들도 듣고 싶고, 롸킹 스피릿이 번뜩이는 8집 노래들도 듣고 싶다. 눈앞에서 라이브로.

다음 콘서트는 꼭 놓치지않고 가야지. 


하지만 우선은 의자에 앉고, 허리를 세우고, 할 일을 해내야 한다. 







'분류불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태어난다면?  (0) 2016.12.27
결심  (0) 2016.12.11
2ne1 잘가...  (0) 2016.11.25
고대 조각상의 페니스가 쬐그만 이유  (0) 2016.07.08
2016년 여름의 시작.  (0) 2016.06.24



... 용서해주는 것, 서툴렀던 어제의 나와 그 사람에게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 우리는 그런 어제 때문에 많은 것을 잃고 고통을 겪고 심지어 누군가는 여기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건 우리의 체온이 어쩔 수 없이 조금 내려간, 하지만 완전히 얼지는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는 다시 돌아왔고 여전한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힘들다면 잠시 시선을 비껴서 서로를 견뎌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되돌릴 수 있다. 근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가 서로를 견디며 왜냐고 묻는 대신 대화를 텅 비운 채 최선을 다해 아주 멀어지지만은 않는다면?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가 괜히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다가 여전한 호의를 숨기지 못해 돌아가는 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랑하죠, 오늘도,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 라고.



----------


2016년 젊은작가상 수상집 대상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에 대한 작가노트에서 적어옴.
작년 수상집에 실렸던 <조중균의 세계>의 작가노트도 마음이 아려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피시버거를 우물거리다가 내뱉는 "사랑하죠, 오늘도"라니 
소박하고도 무심한 그 마음과 태도가 조용하지만 오래 가는 여운을 남긴다.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보선 - 새  (0) 2016.12.11
이제니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0) 2016.11.02
브레히트 -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0) 2016.07.11
생략과 건너뛰기의 유혹  (0) 2016.07.01
진은영 - 청춘 4  (0) 2016.06.29



8월 7일 일요일 오전 열한시 삼십분에 관람. 



첫 인상은 영영 볼 수 없게 된 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이야기, 이정도 였다.


일본영화 특유의 정서? 공기? 같은 부분은 숨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다. 일본어 특유의 재잘대는 듯한 리듬으로 조곤조곤 말하면서 조신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으로 찻잔을 잡고 있는 여성이 화면에 등장할 때는 솔직히 짜증까지 난다. (여자들끼리 그러고 있을 때는 여자들끼린데 좀 편하게 앉아있으라고! 하는 생각이 들고, 남자와 그러고 있을 때는 남자는 편하게 양반다리 하고 있는데 너는 왜 무릎에 굳은살 박고 있냐! 싶고. 물론 이건 하루의 대체를 누워 보내는 나같은 인간이 갖는 이상한 심통일 것이다.) 십대나 이십대 초반까지는 그런 정갈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꽤 근사해 보였는데 (일본 소설들을 열심히 읽던 때와 일치한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꾹꾹 눌러대는 것이 좀 질리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가 나쁘지도 않지만, 딱히 그렇게 좋은 점도 잘 모르겠다 싶었던 것도 이런 정당하지는 않지만 떨칠 수 없는 이유 없는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회사 선배가 영화도 보는게 어떻냐고 해서 별 기대 없이 보러 갔고, 사실 영화 중반에 너무 피곤해서 잠깐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교과서대로 잘 만들었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정한 구도, 사물, 음영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수미상관 식으로 여러번 등장하는, 역시나 정갈하고 질서정연하게 깔려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주인공의 시점샷이 바다에 물질하러 나가는 이웃집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점샷으로 연결될 때, 나는 그 할머니가 살아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상실과 "치유"에 대한 영화라고 홍보했으니까) 혹시나 반대의 경우가 되면 어쩌나 하고 염려했다. 여자에게 약속한대로 꽃게인지 문어인지를 정확하게 가져다준 할머니에게 불사신 어쩌구 하는 대목도 예상가는 대목이었지만 쉽게 감동하는 나인지라 이것 또한 예상대로 뭉클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왜 들어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이 할머니와의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었을까. 무언가에 홀린듯 장례 행렬을 좇아, 검푸른 바다와 땅의 경계가 아슬아슬한 그 곳에 선 여자를 발견하게 되는 그 장면에 이르기 위해. 


어째서 누구는 영원히 부재하게 되고, 누구는 웃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가. 그리고 그 부재의 영역으로 걸어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당연하지만, 영영 사라진 자 혹은 죽은 자에게 그 답을 들을 수 없기에 완벽한 미지로 남고 그렇기 때문에 남은 자의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마지막 뒷모습인지도 모르고 헤어진 할머니와 남편처럼 돌아오지 못할까 전전긍긍했던 옆집 할머니의 무사귀환이 있고 나서야 여자는 남편의 자살을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던, 하지만 그걸 결코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할 수 없었던 울음 섞인 질문을 터뜨려낸다. (도우시떼!)


치매에 걸려 사라진 할머니와 뒤에서 맹렬히 달려오는 기차 소리에도 선로를 벗어나지 않은 남편이 설령 여자에게 돌아오더라도 그들조차 자신들이 그렇게 사라져야만 했던 이유를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어떤 빛에 끌려버리고 마는 순간들이 있다는 남편의 대답은 일견 이 무겁고 괴로운 질문의 대답으로 한없이 불충분해보이지만, 역으로 삶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그럼으로써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의 어둠과 자기장에서 빠져나오는것이 결국은 중요한 일임을 드러낸다. 남편은 집에 가자고 한 뒤 몸을 돌려 원경의 프레임 바깥으로 나아간다. 그의 몸짓은 여자의 손을 잡아 끌기 위해, 하다못해 여자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불필요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으며 여자가 자신의 발걸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그녀와의 거리를 그대로 유지한다. 클라이막스의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잡는 대신 먼 곳에서 이 어둡고 아름다운 바다와 연기와 하늘을 조망하는 이유는 여자와 남자의 이 거리와 방향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영화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여자의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남자와 그의 딸의 즐거운 모습이 등장하고, 남자의 아버지는 환한 빛으로 가득찬 이 풍경을 바라보며 좋은 계절이 왔다, 라고 했던 것 같다. 검은 옷 대신 처음으로 하얗고 푸른 옷을 입은 여자는 (예의 그 특유의) 정갈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며 시아버지 곁에 서 있고. 요즘처럼 빛이 폭력적일만큼 강렬한 계절이 아니었다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이 이야기를 더 너그럽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무렵 찾아보면 더 좋을 것 같은 영화다. 



*역시 일본은 섬나라라 그런가. 그들의 해안선이 뿜어내는 고유의 아름다움과 에너지는 매혹적이다. <아가씨>에서도 그랬고. 그에 비해 한국 영화의 자연은 바다보다는 역시 산인 것 같다.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컨택트>  (0) 2017.03.04
<맨체스터 바이 더 씨>  (0) 2017.02.22
<너의 이름은>  (0) 2017.01.30
<라 라 랜드>  (0) 2016.12.23
<부산행>  (0) 2016.07.22



<부산행> / 2016년 7월 21일 



- 머리만 식혀주면 된다, 라는 애초의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게 봤다. CG의 만듦새, 지나치게 짜맞춘듯한 인물 설정과 조합, 후반부의 늘어짐 등등, 단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2016년의 한국이라는 리얼리티가 영화에 조밀하게 또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강점 아닐까. 세월호와 메르스 같은 거대한 사회적 인장은 물론이거니와, 포털 실시간 검색어로 '좀비'라는 단어를 보여주는 방식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감염자들이 덮치는 한가로운 풍경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청년들이라는 작은 장치들까지. 한 가지, 영화를 보다보면 누가 죽고 누가 살지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재난의 상황에서 고등학생들이 죽는 것은 특별히, 어쩔 수 없이, 더 슬프다.  



- 일상적 경험에의 인식에 균열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영화 표값인 만원 한 장의 효용으로는 충분하다는 기준에서도 좋은 영화였다. KTX 탈 일은 없으니, 당분간은 지하철 칸 사이의 문 사이로 누군가가 넘나들때 쳐다보게 될 것 같다. <괴물>을 보고 난 뒤에 한강 다리와 고수부지가 결코 전과 같아보이지 않듯(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괴물>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 생각없이 스치던 일상의 공간이 그로테스크한 재난의 현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나의 일상은 좀더 불온해지고 은밀해질 수 있다. 



- 그러고보면 지하철에서 다른 칸으로 이동할 때 문을 여는 방식이 열차마다 다르다. 손잡이를 직접 잡고 약간의 힘을 써서 돌려야 하는 방법과 그냥 버튼을 누르는 방법. 근데 내가 타는 5호선은 거의 전자인듯? 그동안은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찝찝해 했는데 앞으로는 문 여는 방법을 모르는 좀비들이 저쪽 칸에 득실거린다면 뭐 이정도 수고쯤이야,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히말라야>에 이어 이번에 정유미가 맡았던 역 또한 그저 그렇게 휘발되기 좋은 역 아닌가 했다. 물론 설정 자체에서 오는 한계, 구조와 보호의 대상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점은 아쉽지만. 그녀가 배우로서 가진 고유한 힘이 대규모 상업영화에서도 생각보다 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고착화 되지는 않으려나 하는 (내가 하기에는 쓸데없는) 우려도 들지만. 



- 그간 턱 없는 곤충형 얼굴이라며 공유가 멋있다는 생각은 잘 안 했는데, 이번 영화보고 좋아졌다 히히히. 하지만 30대 후반(추정) + 펀드매니저 (밥먹을 시간도 없어서 책상에서 버거와 콜라를 먹는다) + 유부남 (이건 추가적이긴 하지만, 여튼) = 그런 날렵한 허리선? 이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등식이다. 



- 수안이도 너무 매력 있다. 까만 피부, 까만 속눈썹 안에 가지런히 자리잡은 까만 눈동자, 자동으로 쓰다듬고 싶어지는 까만 머리칼. 앞으로 그 까망까망함 잃지 않고 잘 컸으면.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컨택트>  (0) 2017.03.04
<맨체스터 바이 더 씨>  (0) 2017.02.22
<너의 이름은>  (0) 2017.01.30
<라 라 랜드>  (0) 2016.12.23
<환상의 빛>  (0) 2016.08.14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보선 - 새  (0) 2016.12.11
이제니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0) 2016.11.02
김금희 - 사랑하죠, 오늘도  (0) 2016.08.20
생략과 건너뛰기의 유혹  (0) 2016.07.01
진은영 - 청춘 4  (0) 2016.06.29





한참 머리를 쥐어뜯다 간신히 어설픈 각주 한 줄을 써넣기까지 나는 이런 문장들을 읽고 있었다. 



"The very fact that women are able in general to mensturate, to develop another body unseen within their own, to give birth, and to lactate is enough to suggest a potentially dangerous volatility that marks the female body as out of control, beyond, and set against the force of reason." (Shildrick and Price, 3)


'... Plato seems to want to make very firm his insistence on the destructiveness of the body to the soul. In doing so, he holds up for our ridicule and scorn those lives devoted to bodily pursuits. (...) His misogyny, then, is part of his somatophobia: the body is seen as the source of all the undesirable traits a human being could have, ..." (Spelman 39)


*Feminist Theory And the Body: A Reader. 1999. 



그러다 기지개 한번 하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아무 생각없이 페북 타임라인을 내리다가 이런 아티클을 발견. 


Here's the Weird Reasons Why Ancient Statues Have Tiny Penises



그래, 이거 나도 조각상이나 사진 볼 때마다 궁금했던 거다. 

재밌었던 건 굳이 포스트를 눌러보이지 않아도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이 된다는 것.

남성의 신체 중 유일하게 unruly한 부위이니 최대한 조그맣게 표현하고 싶었던 거다. 커 봤자 무식한 이등시민에 가까워지는 거지.




그러고 생각한다. 이렇게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들의 희열이 있어서 다들 버티는 건가. 


온 우주가 200%의 시그널을 보내주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늘도 이렇게 소소한 우연이 선사해준 작은 재미로 버텨야겠다. 



 


'분류불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태어난다면?  (0) 2016.12.27
결심  (0) 2016.12.11
2ne1 잘가...  (0) 2016.11.25
폭염아 물렀거라  (0) 2016.08.22
2016년 여름의 시작.  (0) 2016.06.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