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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 벌어졌고, 애도가 쉽지 않다.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일러준 말을 온몸으로 발버둥치면서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지는 중이다. 요가를 하고, 요리를 하고, 피아노를 치고, 일기와 편지를 쓰고. 모두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위다. 요가의 많은 동작은 손가락을 펴고 바닥에 단단히 붙이는 것을 요구한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이 떠지면 거실에 매트를 펴고 아주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다가 동쪽으로 나있는 창을 보고 태양경배를 연습한다. 끈기가 없는 성격과 그렇게 좋게 타고나지 못한 신체의 협응력 때문에 발전이 더디지만, 어느 날 발가락을 굴리고 허벅지를 바닥에 닿지 않게 차투랑가에서 업독으로 이어지는 동작에 드디어 성공했다. 불안과 슬픔과 무력과 절망 가운데 가끔씩 찾아오는 기쁨과 희열과 성취의 순간. 씹고 넘기기에 제법 힘이드는 채소들을 토막내고 채썰어서 차곡차곡 냉장고를 채운다. 손끝이 주황색으로 물들만큼 당근을 먹고 아삭아삭 소리로 내 고막을 채우기 위해 셀러리를 씹다보면 턱이 아프다. 20+@년만에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개방된 공간을 다행히 발견했다. 얼마나 행운인지. 조율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다. <괴물>의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로 시작했고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새로 건설해 나가야 할 삶의 각본은 과연 무엇일까?), 베이직 중의 베이직인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로 넘어갔다. 또랑또랑한 박자에 맞춰 왼손과 오른손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알레그로를 지키지는 못해도 스타카토와 트릴, 피아노와 포르테를 흉내내면서 손목과 손가락 끝에 힘을 풀었다 놓았다 하다보면 한 시간도 훨씬 넘는 시간이 훌쩍 흐른다. 등받이가 없는 딱딱한 의자 때문에 엉덩이가 얼얼하고 허리가 뻐근해진 것을 느끼며 연습실을 나온다. 며칠 전에는 일기장을 뒤적여보다가 이 곳에 와서 1년 반 동안 쓴 일기보다 최근 2달여 간 동안 쓴 일기가 더 많음을 깨달았다. 하루종일 나를 어떻게 몰아쳤는지를 적어내려간 뒤, 비슷한 말들의 행렬로 마무리되는 엔트리들. 그 선두는 대체로 이렇다. 슬프다, 화가 난다, 어떻게 해야할까, 울었다, 울고싶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한번은 텅 빈 길에서 소리를 진짜 질렀다. 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고래), 잠을 자고 싶다, 얕은 잠을 잤다, 꿈을 꿨다. 쏟아진 혼란의 말들은 이내 이것을 매만지는 범박한 말들의 반복으로 마무리 된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다 괜찮아질거야. 밤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등등. 기도처럼, 주술처럼, 몇 번을 반복해서 적고 소리를 내어 읽는다. 편지와 메일을 많이 쓰고, 보내고, 보내지 못한 말들은 지우고 찢었다. 단시간에 적어내려간 것도 있고, 며칠을 울면서 쓰기도 했다. 몇 달을 주저했던 메일을 보낸 뒤 다정한 답신을 받고나서는, 오랜 시간 주저했던 내 마음이 다 불필요했음을 깨닫고, 앞으로 좀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쓰고 싶은 마음이 들면 지체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물론 아직도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짧은 기쁨과 긴 슬픔이 아주 단단하게 뒤섞이고 엉켜있는 겨울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타래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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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는 요새의 나를 이렇게 분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가를 한다. 걷는다. 새를 본다. 피아노를 친다. 음악을 듣는다. 요리를 한다. 일기를 쓴다. 편지를 쓰고 부친다. (혹은 지우거나 찢는다.) 책을 읽는다. 전화를 건다. 술을 마신다. 심호흡을 한다.
눈물이 난다. 화가 난다. 무력하다. 비관에 잠긴다. 충동이 든다.
내가 주어인 말들이 한 편에 있다. 다른 한 편에는 내가 주어가 아닌, 그러니까 나를 찾아왔다가 떠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들이 있다. 이 양 편의 완벽한 분리는 불가능하지만, 한 편을 부지런히 실천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도록 그 벽을 두텁게 다지고 쌓아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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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동안 살이 4킬로 빠졌다. 까마귀(두루미) 자세를 몇 번 시도해보았다. 앞으로 고꾸라질 때 으악하고 외마디 비명이 나오지만, 다치지않으려고 놓아둔 쿠션에 그 소리가 묻힌다. 내 몸을 내가 들어올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한다. 이왕 이렇게 된거 조금 더 몸을 가볍게 만들고 동시에 힘은 더 기르고 싶다. 생각해보니까 이거 성공하면 나 잠깐 새가 되는거네. 까마귀든 두루미든, 모두 날개를 크게 벌리고 하늘을 나는 친구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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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발렌타인 데이. 아침부터 기분이 싱숭생숭했는데 계속 말을 거는 상대방. 애매한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은 상대가 먼저 무너진다. 나도 침울해진 상태로 티칭을 하러 갔다. 수업의 정식 첫 리딩인 "Crying in H Mart"를 읽고 와 의견을 나누는 날이다. 이니셜 리스펀스를 간단하게 디스커션 시키고, 돌아가면서 얘기한 내용을 듣고, 내가 텍스트에 대해 이런저런 렉처링을 한 뒤, 프롬트를 주고 exit ticket으로 라이팅을 시키는 구성. 세팅을 끝내고, 수업 시작을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애들 앞에서 인사말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는게 느껴졌다. 황급히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데 J의 말이 떠오른다. "열여덟 살짜리 애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용기 있는 일 아니니." 웃음이 피식났다. 코로나에 걸려서 회복 중인 J에게 "해피 발렌타인! 몸은 좀 어때? 다 나으면 우리 또 만나"라고 메시지를 보내면서 진정을 하고 교실로 돌아갔다. 애들에게 내가 오늘 수업하다가 울어도 너무 놀라지마, 한국 음식이 잔뜩 나오고, 엄마와, 상실과, 애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하잖니, 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던지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원래도 이 텍스트를 읽을 때는 리딩하고 연결되어 있는 작은 간식을 퀴즈 식으로 준비해서 애들과 나누는데, 이날은 날이 날인만큼 초콜렛까지 얹었다. 두 쌍의 젓가락이 국수가락을 나란히 붙들고 있는 책의 커버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로운 해석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그걸 덧붙였다. 느리고 작지만 그래서 소중한, 깨달음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순간들. 수업을 하다가 결국 코끝이 시큰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애들이 눈치챘을까? 뭐 어때. 그렇게 티칭을 무사히 마치고, 곧바로 이어지는 수업을 무사히 듣고, 해가 다 졌고 바람이 너무 찼지만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제 밤. 한 학생이 메일을 보냈다. 수요일 수업 너무 좋았다고. 자기가 그날 기분이 안 좋았는데, 수업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며 고맙다는 메시지. 나도 고마워. 작고 사소한 제스처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새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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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내내 바람이 차갑고 매섭다. 봄은 쉽게 오지 않아.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거실 밖 창문을 보다가 뭔가 파랗고 동그란 것들이 그 사이를 부지런히 옮겨다니고 있음을 느꼈다. 벽에 붙여놓은 동네 새들을 그려놓은 포스터를 재빠르게 훑어서 그 친구들의 정체를 파악한다. Eastern bluebird구나. 실내복을 입은 채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나간다. 극성맞은 청설모들 때문에 자꾸 자리를 옮기는 파랑새들의 사진을 멀리서나마 찍고, 얼어붙은 손가락을 비비고 온몸을 떨면서 집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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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고,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컨티뉴엄과 그물망에 위치해있음을 깨닫는 에피파니의 순간들. 우연히 접한 텍스트나 음악, 글을 파고 들어가다가 그것이 내 삶의 어떤 지점과 다시 만나는 연결점을 발견할 때. 그러니까 지난 학기에 그냥 흥미로 빌렸던 오래된 책에서 페이퍼에 써도 될만한 작가를 발견해서 꾸역꾸역 뭔가를 써서 냈는데, 그 작가를 다시 이번 학기 수업에서 정식으로 만난다던가. 예전에 읽고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뒀던 어떤 책의 이름과 저자가 갑자기 간절해졌지만 키워드 조차 생각이 나지 않아 이틀을 고생하다가, 드디어 다시 찾게 되었고, 마침 그 작가의 새 책이 2월 말에 출간된다는 것.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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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카페에서 이 긴 일기를 쓰고 있는데 P가 저쪽에서 인사를 한다. 꼭 끌어안고 안부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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