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차의 새 학기, 첫 주, 캠퍼스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몇 달 간 텅 비어있던 동네와 학교에 갑자기 넘실대는 사람들과 소음들의 버거움이 엄청났고, 물러가기 싫은 여름의 마지막 심술인지 엄청나게 지글거렸던 최근 며칠의 더위 때문에 자기 소개와 실라버스를 뒤적거리고 끝나는 가벼운 수업들만 있었는데도 금방 지쳐버렸다. 운동을 잘못해서 아킬레스건이 쑤시는 왼다리를 질질 끌며 집에 걸어가는 길, 동네 고등학교 앞 잔디밭에서 축구 경기가 열리고 있다. 학교 대항전 같은데 좀처럼 할 것 없고 볼 것 없는 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이것도 큰 이벤트인지, 선수들의 학부모와 친구들보다는 훨씬 더 많아보이는 사람들이 경기장을 둘러싼 트랙에 철푸덕 앉아서, 아니면 타월을 깔거나, 각자가 갖고온 캠핑 의자, 알루미늄 간이 스탠드에 앉아서 버건디 저지를 입은 선수들에게 “Go Amherst!”를 외치며 응원을 하고 있다. 얼마만에 직관하는 축구 경기인가. 나도 슬그머니 스탠드의 빈 끝에 자리를 잡는다. 반대편 전광판을 보니 홈 팀이 1:0으로 끌려가고 있고 전반이 15분쯤 남았다. 이 15분 동안 나는 내가 앉아있는 사이드에서 가까운, 홈팀의 오른쪽 풀백을 맡고 있는 17번 선수의 이름이 브라이언이라는 것(Way to go, Brian!), 홈팀의 이름은 허리케인이며(Let’s go Hurricane!), 캐칭이 불안한 허리케인의 골리는 로비(Focus, Robbie!), 원정 팀의 득점은 전반 이른 시간 세트피스 플레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It was very early into the game and they started at the left corner…) 차례로 배운다. 이 동네 2년차 거주민으로서 옆에 앉은 사람들과 함께 홈팀의 플레이마다 박수를 보냈지만 원정팀이 조금 더 우세해 보이긴 한다. 개인기가 좋은 선수들은 홈팀이 분명히 많은데 원정팀의 피지컬이 전반적으로 더 다부지고 무엇보다도 제일 눈에 띄는 건 키퍼 차이. 원정 팀 키퍼는 커버 범위가 거의 노이어급이고, 펀트 킥이 날아가는 궤적도 제법 날카롭다. 자기네들끼리 스페어 볼을 갖고 노느라 아웃된 공을 잽싸게 주우러 가지 않는 볼보이들의 피부색은 피프티 셰이드 오브 브라운 앤 블랙이고, 관중들이 있는 트랙 군데군데에 송아지만한 개들이 털이 수북한 목덜미를 긁어주는 주인의 손길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누워있다. 점수 변화 없이 전반이 끝난다. 하프 타임이 되자, 남의 집 문을 두드려서 사탕을 얻어내고 길가에 레모네이드 스탠드를 차려 용돈을 버는 게 이 나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유년기 통과의례임이 다시금 확인된다. 변화하는 몸에 한창 적응중인 십대들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긴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땋아내린 주근깨 소녀들이 작은 과자봉지 꾸러미를 들고 1달러라고 외치며 돌아다니는데, 애들만 그러는게 아니라 볼캡을 쓴 덩치좋은 아저씨까지 얼음이 가득한 아이스박스를 가뿐하게 옆구리에 끼고 망고와 딸기, 코코넛 맛의 하드를 2달러에 판다. (아저씨, 벤모는 안되죠?)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조명탑에 불이 들어오고, 후반전이 시작한다. 휴식을 하고 나온 덕인지 아니면 라커룸 아닌 라커룸 토크가 매서웠는지 경기 템포가 빨라졌다. 홈팀이 열심히 몰아치다가 차단당한 공을 우당탕탕 원정팀이 전진시킨다. 전반부터 불안했던 로비가 결국 실책성 플레이를 범한다. 내 옆에서 모든 패스와 모든 킥과 모든 스로인마다 파이팅을 불어넣던 백인 할아버지는 홈팀의 골망이 흔들린 줄 모르고 “Good defense”라고 환호하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이제는 2:0. 그러나 버건디 소년들이 영패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뿜어내기 시작하고 이에 홈팀 팬들도 더 가열찬 응원을 보탠다. 결국 돌파하던 홈팀의 공격수가 상대 골문 앞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가면서봐도 명백한 파울을 얻으며 드라마틱하고 아티스틱하게 쓰러진다. 레프리가 휘슬을 불며 골대를 향해 손을 쭉 뻗는다. 이번에도 옆자리 할아버지는 페널티킥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두근두근, 나를 포함해 스탠드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멀리서 보던 아이들도 갑자기 두손을 모은 채 필드 가까이로 모여든다. 골! 키커가 성공하자 모두가 즐겁다. “You got this!” “One more!” 할 수 있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다시 쏟아진다. 경기장의 데시벨이 올라가자 얌전했던 견공들 중 한 녀석이 갑자기 멍멍, 하고 내질렀고 여기에 그의 친구들이 화답하면서 소리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분위기를 넘겨주지 않으려는 원정팀이 다시 밀고 올라가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우리의 수문장 로비가 또 공을 제대로 처리못했지만 주장 완장을 찬 4번이 골라인 바로 앞에서 간신히 공을 걷어내고 쓰러진다. 동료들이 달려가 등을 두드리고 일으킨다. 이후 리드하고 있는 팀이나 따라가려는 팀 양쪽에서 쥐가 나서 몇 번 드러눕더니 경기가 끝난다. 홈팀의 2:1 패배로 마무리. 졌잘싸의 격려를 주고 받으며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진다. 발목과 어깨가 갑자기 가렵다. 눈으로 공을 쫓고 박수를 보내던 동안의 희미한 소속감에 별안간 낯설음과 외로움이 스민다. 이 정겹고 즐거운 풍경을 담아보겠다고 랩탑의 메모장을 켜서 부지런히 여기까지 썼으나, 내 주변의 아무도 화면에 계속 생성되고 있는 이 긴 글자들의 행렬을 해독할 수 없다. 물론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신나게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기도 하지만. 눈인사를 하고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기뻐하고 탄식하면서도 스몰토크를 나누지 않은 채 남들이 알지 못하는 네모둥그런 덩어리들을 타닥타닥 빚어내는 행위에는 분명 고독한 쾌감이 있다. 이렇게 내 안에 새겨지는 감정을 이방인의 감각이라고 해도 될까? 이만하면 2년차의 첫 주를 마무리하기에 제법 그럴듯한 감상같다. 가방을 둘러매고 다시 집으로 간다. 내일부터 기온이 다시 조금씩 내려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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