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oran 책을 오랜만에 들춰보았다. 물건너 온 책인데 다 읽기는 커녕 그냥 생각날 때 뒤적거리다가 다시 책장에 꽂아넣는 책. 우울하기도 한데 어떤 면에서는 피식, 하게 만드는 아포리즘들의 묘한 위안. 


"To be sterile -- with so many sensations! Perpetual poetry without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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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하자마자 시계를 확인. 8시 반이군. 30분 정도 더 누워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고 음악을 듣다가 창문 열어 환기하고 이불 개고 걸레질한 뒤, 아침 먹고 세수하고 향후의 집중력을 위해 티비를 끈 뒤 커피 올려놓고 뛰어가서 과자를 사왔다(...) 커피를 다 내리고 티테이블을 완성하여 거실 소파에 착석한 시간은 11시 10분 전. 다시 TV를 켰다. 

 

- 재판관들이 등장하고 한차례의 플래시 세례가 지나간 뒤 선고가 시작되었다. 블랙리스트와 세월호 쟁점은 탄핵 사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해석에 감정적으로는 화가 났지만 법리적으로 신중하게 접근한다면 그럴 수 도 있겠지... 그래도 역시 찜찜했다.

 

- 이러다가 설마 기각 되는거 아냐? 하는 불안이 싹틀 때 쯤, 흐름이 바뀌었다.  경어로 진행되던 판결이 주문에 이르러 평어로 전환되던 그 순간!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주문이 선고되어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지만 이내 우와와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래는 생중계로 공개된 선고문의 후반부. 헌법수호의지 부족(이라고 쓰고 태도 불량이라고 읽는다)을 지적하는 부분도 너무 통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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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살펴본 피청구인의 법위반 행위가 피청구인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에 관하여 보겠습니다.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여야 함은 물론, 공무 수행은 투명하게 공개하여 국민의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청구인은 최서원의 국정개입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그에 관한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며 오히려 의혹 제기를 비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국회 등 헌법기관에 의한 견제나 언론에 의한 감시 장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피청구인은 미르와 케이스포츠 설립, 플레이그라운드와 더블루케이 및 케이디코퍼레이션 지원 등과 같은 최서원의 사익 추구에 관여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배행위는 재임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국회와 언론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를 단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피청구인의 지시에 따른 안종범, 김종, 정호성 등이 부패범죄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중대한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것입니다.

 

한편, 피청구인은 대국민 담화에서 진상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였습니다.

 

이 사건 소추사유와 관련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수호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 결정에는 세월호 참사 관련하여 피청구인은 생명권 보호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지만, 헌법상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고, 다만 그러한 사유만으로는 파면 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재판관 안창호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선고를 모두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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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순간, 핸드폰으로 포털 화면을 캡처해보았다. 으히히. 프로필이 엄청나게 빨리 업데이트 되었다. 

 

 

   

 

 

 

 

- 세월호를 둘러싼 쟁점과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동시에 고려한 흔적이 돋보이는 보충의견도 좋다. 4.16 연대의 논평과 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의 보충 의견을 읽는데 눈물이 났다. 논평대로, 재판관들의 보충의견대로 이 비극을 치유하는 일은 새로운 질서가 도래한 지금부터 진짜 시작일 것이다. 유가족들과 우리 사회의 상처가 조금쯤은 아물기 시작할 그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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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연대 논평] 세월호 7시간 제외시킨 것은 상식 밖

 

헌재의 탄핵인용은 당연한 결정이다. 온 국민의 마음속에서 이미 박근혜는 탄핵당하여 대통령의 자격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재가 박근혜의 세월호참사 당일의 직무유기를 탄핵사유로 인용하지 않은 것은 상식 밖의 일로서 매우 유감스럽다.

 

헌재는 대통령이 당일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는지 여부가 탄핵심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청와대가 당일 행적에 대한 기록과 정보를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특검 등이 당일 행적 수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헌재가 대통령이 관저에 머물렀다는 사실확인만으로 탄핵근거로 삼기는 쉽지 않았을 수 있다. 하지만 이로써 모든 불법적 편법적 권력수단을 동원해서 진실을 가려온 박근혜의 권한남용이 특조위 조사도 특검수사도 헌재 탄핵심판도 모면하는데 통했다는, 법치의 관점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선례가 남겨지게 되었다. 세월호 특조위 조사가 방해받지 않았다면, 특검수사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헌재의 판결에 다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터이다.

 

헌재의 판단이 세월호참사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와 수사를 회피하거나 위축시키는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헌재의 결정과정은 진실규명과 진실을 감추기 위한 온갖 불법행위에 대한 온당한 처벌과 심판의 중요성을 더욱 선명히 보여준다.

 

더불어 이번 헌재의 판단을 계기로 헌법상 대통령의 국민생명권 보호 의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국민의 권리도 보다 실질적인 의무와 권리로 해석되고, 조문상으로도 보완되어야 할 필요성이 확인되었다. 이제 우리는 국민생명권이 헌법상의 권리로도 구체화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제 진짜 진상규명의 시작이다. 우리는 위헌세력의 진실은폐 장막을 걷어내서 세월호참사 이후는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는 전 국민적 염원을 실현해 낼 것이다.

 

 

-------

 

세월호 참사 관련 소추사유에 관한 보충의견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

 

(...)

 

○ 국가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이 상황을 지휘하는 것은 실질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효과도 갖는다. 실질적으로는, 경찰력, 행정력, 군사력 등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적으로 발휘할 수 있어 구조 및 수습이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척될 수 있다. 상징적으로는,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재난 상황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구조 작업자들에게 강한 동기부여를 할 수 있고, 피해자나 그 가족들에게 구조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며,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위로를 받고 재난을 딛고 일어설 힘을 갖게 한다.

 

진정한 국가 지도자는 국가위기의 순간에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고 피해자 및 그 가족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국민에게 어둠이 걷힐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지도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국가위기가 발생하여 그 상황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이를 통제, 관리해야 할 국가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이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 4. 16.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피청구인은 그날 저녁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집무실에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머물렀다. 그 결과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형 재난이 발생하였는데도 그 심각성을 아주 뒤늦게 알았고 이를 안 뒤에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급박한 위험이 초래된 국가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음에도, 그에 대한 피청구인의 대응은 지나치게 불성실하였다. 그렇다면 피청구인은 헌법 제69조 및 국가공무원법 제56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한다.

 

(...)

 

국가 최고지도자가 국가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하여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므로 피청구인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위반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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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의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이정미 재판관은 퇴임 전 마지막 업무가 탄핵 판결이었네. 대국민 PT라고 해야하나, 클라이언트한테 프로젝트 최종 보고를 멋지게 하고 퇴장하는 셈이다. 그 분은 업무 인수인계서 같은건 안쓰겠지... 여튼 막중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단정한 용모를 유지해야 하는 일하는 여성의 이중고를 보여준 두 개의 헤어롤, 잊지 못할거에요. 귀여우면서도 멋졌어요 정말. 해학의 민족들에게 신나는 짤 재료를 던져준 것도 고맙습니다...

 

- 현재 나의 고민. 치킨도 먹고 드라마 본방도 보고(이제훈!) 수영도 가고 특집 토론도 봐야하는데, 이 넷 중에 무얼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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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감기 같은거 안걸리는 체질인데. 컨디션이 좀 안 좋다고 이삼일 정도 느끼다가 평소로 돌아오곤 했었는데. 작년 봄에 여기저기 아프고 난 뒤부터 확실히 몸이 달라졌다. 휴지통이 너무 금방 찬다. 이렇게 풀어도 풀어도 금방 충전되는 콧물이라니. 


잊을만하면 또 습격해온다. 결국 깊숙한 데 숨겨두었던 메세지들을 굳이 찾아서 꺼내 읽었다. 내 상처 후벼파기지 뭐. 방바닥을 때리면서 울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디다 툭 터놓고 말할데조차 없는 내 처지가 한심스러워서 더 슬퍼졌다. 방의 불을 켜고 다시 책상에 앉았는데, 울고 나니 오한이 든다.  


지금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 이 수렁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것도 결국 나의 태만이자 나이브함이다. 슬픈 것도 아니고 짜증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거다. 다 내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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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라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열었더니 눈이 내리고 있다.

듣던 음악을 멈추고 마른 땅과 나뭇가지 위로 눈송이들이 조용히 모여드는 소리를 듣는다.

밤은 이렇게나 다정하다. 

나는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잘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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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울적한 생각이 이리저리 치닫는 밤, 미국에 있을 때 엄마와 주고받던 메일들을 읽고 싶어져서 (조금이나마 힘이 될까 싶어) 안 쓰던 핫메일 계정에 어찌어찌 해서 간신히 접속하였는데 (한 5년만인가...) 메일이 몽땅 사라져있다! 찾아보니 MS가 각종 서비스들 통합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접속 안 된 계정들은 청소를 했다고... 365일 동안 inactive일 경우 다 삭제하는게 terms of agreement에 있다는데, 읽을 수 없다니 더 간절하다. 


핫메일에 뭐가 들었지, 또 이렇게 사라진 기록들이 뭐가 있으려나 하고 생각하다가 싸이월드까지 접속 했다. 그리고 내가 찾고 싶었던 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친구 R의 기억인가 싶어졌다. 싸이월드 아이디는 뭐였더라. 이것도 빌어먹을 핫메일 아이디였네. 여러번 시도 끝에 패스워드 찾는 것도 성공했지만, 여기도 다 사라져있네. 재작년인가 한창 백업 열풍 불 때 글은 안 사라진다고 해서 다이어리는 나중에 필요할 때 봐야지 하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이어리 글도 하나도 안보이고... 여기도 검색해보니 싸이월드 측에서 서비스 재정비하면서 일촌평과 쪽지 등 마이너한 기록들은 다 삭제했다고 한다. (글은 고객센터에 신고하면 복구가 되나? 흠...) 그 친구와 주고받았던 마지막 쪽지가 갑자기 이렇게 애타게 될 지 그때는 몰랐었네. 사실 핫메일에도 그 친구가 보낸 메일이 서너 통쯤 있었다. 읽었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던 메일들... 그 친구한테 답장한 내 마지막 쪽지가 어땠는지, 그 친구가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 조각조각 깨져버린 기억들을 어떻게든 복구하고 싶지만, 다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 아이가 너한테 하는 마지막 연락이야, 같은 말을 했었던가. 


너.

이렇게 별 것도 아닌 나를 언제나 대단하게 봐주었던 너.

내가 한 때 반짝거릴 수 있었다면 그건 너 덕분이었는데.

세상에 정붙일데가 하나도 없다고 느낄 때, 매일 밤 울 때, 먼 곳에서도 니가 변함없이 보여준 애정의 온기로 버텼던건데.

늦게나마 그걸 깨달았을 때 조차 나는 너한테 정말 고마웠다고, 진심과 정성을 담아 먼저 인사해주지 못했구나.

니가 나한테 전한 니 마지막 소식의 흔적조차 나는 무심하게 잊고 있었네. 


어찌 보면 그냥 0과 1의 조합일 뿐인데, 그 아무것도 아닌 무미건조한 두 숫자가 얽혀서 만들어낸 덩어리를 통해 우리는 소통을 하고 마음을 나눈다. 그리고 그 덩어리들은, 어딘가에 무한히 저장가능한 0과 1의 조합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라지지 않을거라고 방심하고 대충 보관해두고 있다가, 뒤늦게 그걸 잃고 애달파한다. 


0과 1이 만들어낸 매끈하고 완전한 기록들은 사라졌으니, 울퉁불퉁하고 불완전한 내 머릿속 조각 기억이라도 잘 붙들고 있을 수 밖에. 살면서 그 친구와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시 마주치는 행운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그때는 잊지말고 지금의 그리움과 고마움을 먼저 진심으로 전해주자는 다짐을 간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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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언니의 급 카톡을 받고 오랜만에 학교 사람들 몇몇이 모이는 자리에 끼게 되었다. 가기 전에는 너무 우울했지만, 막상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니 역시 이런저런 다양한 수다를 나누며 기분이 좀 풀렸다. 그 중에 재밌었던 이야기 토막 하나를 남기자면. 



한 친구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시민들 대상으로 교육워크샵 같은걸 진행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해 상상해보세요, 라는 질문을 던지면 50대 이상은 이루지 못한 꿈이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이런저런 대답을 내놓는데, 오히려 10대, 20대는 다시 안 태어나고 싶다고 하더란다, 하는 주제를 꺼내놓았다. 우리는 역시 헬조센이군! 하며 젊은이들의 답변에 공감하고, 각자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K 언니는 "그냥 고요한 바닷속 미역?"이라고 했고, 다른 언니들도 바위나 나무 같은 자연물, 아니면 부잣집 고양이 같은 소망을 고백했다. 나는 뭐가 좋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콸콸 흐르는 용암의 이미지가 갑자기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와 너무 멋지다. 내가 한번 뿜으면 니들 다 죽거나 다쳐. 자주 울컥하고 자주 화나고 자주 들뜨는, 요즘의 나와 너무 딱 맞는데...  "나는 활화산 할래요, 아님 활성 단층 같은거. 다시 태어나는 거 생각만해도 괴롭지만, 그래도 태어나야한다면 대빵 힘 센걸로 태어나고 싶네." 다들 웃으면서 "요새 많이 힘들었구나"와 같은 말들을 건네주었지만, K 언니는 미역 같은 하찮은 미물을 떠올린 자신의 스케일에 반성한다며 나의 답을 높게 사주었다. 우리는 카톡 프로필 메시지를 샌 안드레아스로 바꾸자면서 한참을 깔깔거렸다. 



집에 오는 길에, 앞으로 K 언니랑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를 떠올렸다. 멜랑콜리아의 운석으로 태어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중력의 궤도를 타고 지구를 향해 힘차게 돌진하는 미지의 운석. 다양성 영화라는 불분명한 이름을 달고 독립영화 시장을 잡아먹으면서 재개봉되는 영화들 솔직히 반기지 않지만, <멜랑콜리아>만큼은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지만 안되겠지. 그 영화는 수지타산 안맞을거야... 라스 폰 트리에 특별전 같은거 열렸으면 좋겠다. 극장에서 그의 영화 전부 다 보고 우울의 독에 빠져버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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