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4 금요일. 영화보고 이리저리 신나게 메모했는데 실수로 삭제해버려서 대충 쓰는 후기. 


- 컨택트. 조디 포스터가 나온 옛날 영화가 재개봉한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영화 스틸컷을 보고 꽂혔다. (조디 포스터의 영화는 ""택트라더라...) , 이건 극장에서 봐야하는 영화구나 하고. 드넓은 평원의 광활함을 압도하는 우주선의 존재감. 거기다가 모양은 어떻고. 스티브 잡스가 자기 가운데에다가 모셔두었을 같은 스타일이다.




- 영화는 <트리 오브 라이프> 같기도 하고 <그래비티> 같기도 하다가 <괴물> 같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후반부에서 주인공 루이스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전반부의 무게감과 정교함에 비해 성기다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영화의 소위 "반전" 영화의 내러티브 규칙과 결합되어 있어서 좋았다. 


- 결과적으론 최근에 영화들 중에서는 여운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영화다. 음악/사운드와 영화의 전반적인 미감이 묘하게 결합되면서 관객의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리는 방식을 좋아하는데. 특히나 처음으로 우주선(?) 진입하던 순간, 영화 인물들은 중력이 약해지면서 두둥실 뜨는 것과 반대로 사운드는 중량감 있게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짓누르던 때의 몰입감이 대단했다. 왠지 어깨가 아픈것 같고, 씩씩대는 숨소리조차 죽이게 되는, iptv 감상으로는 절대 느끼지 못하는 현장감. 지금도 OST 듣고 있는데 발밑으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오는 같고 그렇다. 




- 한국 포스터... 구리다. 90년대 느낌이 물씬한 문제가 아니라( 물론 그것도 문제인듯..) 영화 후반부의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디자인. <인터스텔라> 스멜... 거기다가 "어라이벌" 그렇게 어려운 제목도 아닌데 "컨택트" 이름을 바꿨을까? 나처럼 조디 포스터 영화로 착각한 사람들을 노린건가? 아니면 외계인과의 "조우" 중심이 되는, 이미 익숙한 플롯의 SF 작품을 포지셔닝하기 위한 마케팅적 판단인가? 어쨌든 오른쪽 버전이 훨씬 간결하고, 영화의 동력이 되는 질문을 명쾌하게 내세운다는 점에서 좋다. "Why are they here?" 영화는 결국 "What is your purpose on earth?"라는 질문의 답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세계관을 전달하기 위한거니까. 도착(Arrival) 출발(Departure), 닫힘과 열림, 현재와 미래가 맞물려 도는 이야기는 마치 헵타포드들의 문자처럼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없는 원형의 이야기가 된다.



    



- 영화는 대략 이렇게 요약될 있을 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과 다른 언어 체계를 갖는 헵타포드들의 언어, 시제도 문장의 시작도 끝도 없는 완결된 원의 형태로 형상화 되는 언어를 배움으로써 선형적 시간이 지배하는 언어 질서의 틀을 벗어날 있다. 비선형적 언어와 사유의 자유를 얻게 , 그래서 미래의 일까지 있게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살아나갈 것인가? 루이스는 딸에게 말한다. "It's unstoppable." 그래도 멈출 없는 .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슬픔, 불행, 절망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하는 사랑의 기쁨, 행복, 환희를 껴안으려고 하는 루이스의 겸허한 강인함. 그리고 굳건한 다짐에 기반하여 피어나는 소통가능성에 대한 믿음. 믿음은 결국 세계마저 구원한다. 


- 이 믿음을 나이브하다고 있겠지만, 그래도 대책없는 무조건적인 낙관이 아니라는 점이 영화의 진짜 매력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루이스가 외계인과 소통에 성공하는 장면은 곱씹을 수록 재밌다. human이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방호복을 벗어던지는 그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얼굴을 선명히 드러낸 채 헵타포드의 몸인 촉수(?) 투명한 벽을 가운데 두고 처음으로컨택트하는 순간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걸음의 전진. 시간의 선형성이 해체되어 하나의 원처럼 통합된 헵타포드의 언어 다가가는 순간에도 모든 존재는 (루이스도, 헵타포드도) 여전히 그들의 몸에, 탄생과 죽음, 삶의 시작과 끝을 잇는 선형적 시간의 진행에서 결코 빠져나올 없는 물질적(corporeal) 몸에 매여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 또 구원하는 것은 결국 헵타포드의 언어가 아니라(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방문은 일방적 선물이 아닌 미래의 호혜를 위한 초석이다)  극복할 없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의지이다. 영화의 가장 극적인 장치가죽음 이유도 아마 이와 관련있지 않을까. 작품에서죽는인물들, 희귀병에 스러진 루이스의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하는 유언을 남긴 중국 장군의 부인, 심지어 군인들의 공격에 희생당한 헵타포드 마리(?) 존재는 모두 역설을 보여준다. 누구도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몸은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굴복하더라도, 그들의 삶이 남긴 흔적은 원형의 언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남은 이들의 삶과 기억에 함께 한다




에이미 아담스가 아닌 다른 배우가 루이스 역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아예 불가능하다. 비루한 말로는 표현이 도저히 불가한 그 섬세함. 바람에 휘날리는 잔머리 한 올, 푸석한 피부 각질 한 톨 모두 그녀가 연기하는 루이스의 아우라에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 눈빛. 유약해보이면서도 미세한 동요의 한 꺼풀 뒤에 자리잡고 있는 끝모를 단단함. 배고픈 맹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결국 그를 돌려세우는 토끼나 사슴 같달까. 어째서 아카데미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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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월요일 오후 두시 십분. 


집에서 출발한 직후, 오후 일정 취소를 알리는 문자를 받고 갑자기 붕 떠버린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하다가 이왕 시내 나오는 김에 영화나 보자고 결심. <퍼스널 쇼퍼>나 <컨택트> 중 하나를 보고 싶었으나 시간과 동선이 다 애매했고,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과 배우진에 미셸 윌리엄스가 있길래 검색 시작 전까진 이름도 모르던 이 영화로 결정. 심지어 난 맨체스터도 지성팍의 그 맨체스터인줄 알았지 뭐야… 쨌든 보스턴에 사는 남자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라는 줄거리를 보고 가뜩이나 오늘 날씨도 추운데 뉴잉글랜드에서 찍은 영화라니, 생각만해도 더 춥다 하면서 상영관으로 입장. 


영화에서 좋았던 점.


- 플롯은 섬세했고,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영화의 초반부는, 끝나고 곱씹어 보니 이후의 전개를 세련되게 암시했었네. 예를 들면 이런거. 영화가 시작하면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그리고 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배 한 척을 본다. 삼촌 리는 조카 패트릭과 갑판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며, 그의 형이자 패트릭의 아빠 조는 배를 몰고 있다. 삼촌은 조카에게 묻는다. 니가 무인도에 간다면 아빠랑 나 중에 누구를 고를거야? 라는 질문을 한다. 조카는 아빠를 택하고, 삼촌은 조카의 대답이 서운한듯 다시 생각해보라며 장난을 건다. 리는 살갑고 정다운 삼촌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런데 이 질문은 이후 영화에서 리가 겪어야 할 상황으로, 즉 심장병을 앓던 조가 사망하면서 아직 미성년자인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리를 지정한 상황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리는, 무인도에 같이 가자고 할만큼 사랑하던 조카 패트릭을 맡는 일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왜? 도대체 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기실 영화의 흐름은 이와 같은 과거의 리와 현재의 리를 오가며 그의 과거와 내면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 바다 위에서 세 남자의 즐거운 시간을 보여주던 영화는 갑자기 보스턴에서 잡역부 생활을 하고 있는 리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세입자들의 온갖 불편을 처리하는 리의 단조롭고 고된 일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중 첫번째는 계속 새는 꼭지를 고쳐달라는 한 노인의 요구이다. 그는 열번을 고쳤는데도 계속 물이 샌다고 하며, 이에 리는 마개가 물을 제대로 stop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대꾸하며 마개를 갈든지 아니면 전체를 갈든지 알아서 택하라는 식의 미적지근한 답을 한다. 노인은 리에게 좀더 제대로된 해법을 제시할 수 없냐고 역정을 내는데, 이 에피소드는 실상 맨체스터로 돌아간 이후 드러나게 되는 리의 과거를 은유한다. 아무리 고쳐도 결코 고쳐지지 않고 계속 물이 새는 파이프처럼, 그의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 영화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과거의 리와 현재의 리는 얼마나 다른 인물인가. 리를 연기한 케이시 에플렉의 갈곳없는 눈빛과 터덜거리는 걸음,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냥 우울하지는 않다. 아이러니가 자아내는 마르고 쓴 웃음의 순간들이 의외로 인상적이고, 생각보다 꽤 깊숙한 곳을 찌른다. 예를 들면, 땅이 얼어서 형을 바로 묻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럭저럭 아버지의 죽음을 잘 견뎌내고 있는것처럼 보이던 패트릭이 냉동닭을 보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작은 유머도 매우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파이프를 고쳐달라는 노인 다음에는 가족 행사에 참석하는게 귀찮다며 불만 섞인 전화를 하는 할머니가 나오는데(이 때 리는 그녀 옆에서 전등을 갈고 있다), 이 때 그 할머니는 I could slit my throat이라고 말한다. 그 장면에서는 노인네 말 참 터프하게 하네 하면서 피식 웃었는데, 이후 리가 폭발하는 대목, 그러니까 권총으로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발버둥을 치는 장면에서 할머니의 그 무심한 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 영화는 결국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린다는게, 과거가 치유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리의 비극적인 과거는 생각보다 일찍 밝혀지는데, 이후 영화가 진행되면서 나는 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건가? 하고 생각했다. 아마 리 스스로도 조금은 그럴 수 있다, 그러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관객이 그렇게 착각할만한 상황 상의 변화를 몇 가지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배의 처분 문제가 그렇다. 영화의 남자들이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던 그 배를 패트릭은 계속 갖고 싶어하지만, 그는 commercial vessel을 소유할 수 도 운전할 수도 없는 미성년인데다 리는 유지비에 모터 교체비를 감당할 수 없다며 배를 팔아야 한다고 갈등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가도 엑스 와이프인 랜디와의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사소한 실수가 그를 다시 주저앉힌다. 깜빡하고 올려둔 소스가 다 타버려 집안에 연기가 자욱해지자, 등장하는 환영들. 이 대목에서 나는 마치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회복이란, 구원이란 얼마나 요원한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는 성급함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장면이 나온 뒤에야 리는 패트릭과 자신의 거취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방법을, 형 친구 데이빗의 도움을 빌려 마련해낸다. 자신이 이곳의 기억을 버텨낼 수 없음을 온전히 깨달은 것이다. 

 

- 리가 소중하게 보관하는 액자 세 개에는 과연 누구의 얼굴이 들어있을까. 어쨌든 이 액자를 발견한 뒤 패트릭은 "I can’t beat it"이라고 말하는 삼촌, 도저히 맨체스터에 살 수는 없다고 고개를 떨구는 삼촌을 비난하는 대신 그를 껴안고 위로해준다. 


- 미셸 윌리엄스는 그야말로 어메이징이다. 영화 시작하고도 한참을 안나오길래, 도대체 언제 나오는거야 하며 기다렸고, 그녀가 연기하는 랜디가 등장하는 시간은 뜻밖으로 작았지만, 영화가 끝나고 가장 기억에 남는건 역시 리와 마주친 그녀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폭풍처럼 미안함과 회한과 고통과 슬픔을 토해내는 랜디 앞에서 새카맣게 타버린 리의 심리적 황량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랜디를 두고, 바닥을 쳐다보면서 “There’s nothing there” 라는 말만 반복하는 리. 액션과 리액션의 완벽한 조응을 보았다. 미셸 윌리엄스는 정말 딱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리를 위한 이 영화의 supporting role을 완벽하게 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영화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몇몇 지점에서는 꽤 훌륭하다고 할 만한 순간들도 있다. (패트릭과 리가 다투는 장면들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의 상처난 manhood를 반추하는 멜로드라마”라는 이야기의 태생적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이 한계에 대한 나의 의심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모습을 드러내는 매우 작은,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상한 디테일에 의해 강화되었다. 


- 바다에서 시작한 영화는 바다에서 끝난다. 영화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면, 언 땅이 녹아서 형을 드디어 매장하고, 배의 모터 문제를 해결한 패트릭과 리가 어린 시절처럼 바다에서 웃으며 낚시를 하는 엔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엔딩이 과연 리에게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하는가? 바다는 어디까지나 도피처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라는 제목을 떠올려보자. 여기서 중심은 바다가 아니라 맨체스터이다. 추위를 걷어갈 7월의 여름이 올 때 패트릭을 데이빗에게 맡기고 맨체스터를 다시 떠날 리의 미래가 암시하듯, 리는 영화의 제목과는 달리 맨체스터 대신 그 주변부인 바다에 머무르는데서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manhood의 추락과 훼손을 영원히 절망하는 이야기, 결국 백인 남성인 감독 케네스 로너건이 백인 남성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로 보인다. (덧붙이자면, 뉴잉글랜드, 바다, 배, 그리고 육지를 떠나려는 남자의 조합은 <모비딕>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설정이다. 집에 와서 모비딕의 시작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난 바다로 가야해! 라고 외치는 이쉬마엘의 이 구구절절한 심경고백이라니. “Whenever I find myself growing grim about the mouth; whenever it is a damp, drizzly November in my soul; (…) that it requires a strong moral principle to prevent me from deliberately stepping into the street, and methodically knocking people’s hats off — then, I account it high time to get to sea as soon as I can. This is my substitute for pistol and ball.” 이 정도면 이쉬마엘과 영화 속 리의 상황을 구분하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 아닌가.)


- 나아가 재미있는 건, 이 도피처에 이들을 머무르게 해주는 배, 오래된 모터 때문에 팔아치워야할지 말아야 할지로 리와 패트릭의 갈등을 부추겼던 그 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국 지켜내는 이 배의 이름이다. 뱃머리에 큼직하게 써진 채,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서 두 번 보여지는 이 배의 이름은 Claudia Marie인데, 이 이름은 알고보니 형 조를 묻고 난 뒤 챈들러 가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 앞의 비석을 훑을 때 아주 잠깐 지나가는, 조와 리의 어머니 이름이다. 


- 영화에서 반복되는 것 중 하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의 형제, 누구의 아버지 등 부계의 관계를 통해 인물들이 소개되거나 언급되는 말들이다. ("저 사람은 리 챈들러에요. 패트릭의 삼촌이죠." "얘는 조 챈들러의 동생이야!" "자네가 그렇다면 xxx 챈들러의 아들인가?") 이러한 말들은 변변한 장의사도 없을만큼 작고, 그래서 누구나 누구를 알고 있는 곳으로 설정된 맨체스터의 지역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 세계에서 이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여성의 존재, 보다 정확히는 이 부계적 질서의 부속품인 엄마 혹은 부인의 존재는 남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들 별로인 인물로 그려진다. 패트릭의 엄마는 알콜 중독자였고, 랜디는, 복잡한 맥락을 단순화 시켜서 말하자면, 똑같이 상처입고 절망한 리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다가 자기 혼자만 새출발한 캐릭터이다. 이들은 남자들의 고단함과 남자들의 즐거움과 남자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리가 겪은 끔찍한 사건도 따져보면, 리와 그의 친구들의 파티를 강제로 해산시킨 랜디의 잔소리에서 출발한다. Henpecking wife! 리는 랜디 때문에 깨진 흥을 혼자서라도 즐겨보겠다고 벽난로에 불을 켜고 맥주를 사러 나가는 거고. 다시 거리에서 마주쳤을때조차 리의 입장에서 보면 랜디는 헤어지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전히 상처난 데를 후벼파고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이를 거칠게 종합하자면, 이 세계에서 좋은 여성, 혹은 무해한 여성은 죽은 여성이라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남성들의 유대에서 긍정되는 유일한 여성은 이미 비석에 그 이름이 새겨진, 배로 물화된 클로디아 마리라는 점에서 다시 확인된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소위 이 “선한”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의 주인이 영화 속에서는 단 한번도 제대로 등장하기는 커녕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와 리 형제의 아버지도 영화 초반에는 등장하는데!) 다시 말해, 그녀의 이름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사내들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배의 이름으로만 영화 속 세계에서 그 효용가치와 자리를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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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토요일 6시. 2017년 극장에서 본 첫 영화. 


 J가 보러가자고 해서 명동 CGV에서 보았다. 호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무척 감동받았기에 그 작품보다 좋으려나 하는 궁금함과 함께. 그러나 한 때 에반게리온도 찾아 보고 J Rock 밴드 앨범도 몇 개 사본 적 있었지만, 시작부터 콧소리 낭낭한 보컬이 왕왕 노래하는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 특유의 문법을 담백하게 받아들이기는 역시 힘들었다. 


서로의 삶에 불시착한 타키와 미츠하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세히 따지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가는 전반부는 소소한 재미도 있고 귀여웠다. 하지만 가볍게 핑퐁거리며 네트를 넘나들던 탁구공 같던 영화는 타키가 미츠하를 만나러 가면서 타키의 시점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러한 전환이 결국 도시와 시골, 남자와 여자 같은 일련의 위계를 그대로 투영한 이야기 진행이라고 느껴져서 별로였는데, 이는 미츠하의 모습을 처음으로 관객에게 세세히 보여주던 장면에서부터 느꼈던 실망감 혹은 불편함과도 관련있다. 치마 잠옷을 입고 자는 미츠하의 드러난 다리를 훑고 가슴의 곡선을 보여주고 얼굴로 올라가는 카메라의 시선은 만화/애니들이 여성 캐릭터를 관습적으로 그리고 보여주는 방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으며, 영화가 착실히 구축하는 순진하고 조신한 시골 소녀와 씩씩하고 정의로운 도시 소년이라는 구도는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소년이 여전히 미약한 소녀를 구하러 오는 이야기를 예비한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가 세월호 사고를 알고 영화에 반영했다는 "가만히 있으라"는 마을 방송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움찔했다. 굳이 그 대사가 아니어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넘어지고 구르는 미츠하와 친구들,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보는것은 충분히 괴롭고 슬픈 일이다. 무스비가 어쩌고 저쩌고하는 장면, 또 "너의 이름은!"을 무한 메아리치듯 외쳐대는 장면들이 슬슬 지겹다가도, 그런 장면이 나올 때면 끼고있던 팔짱을 풀었으니까.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이상했던 건 혜성이 마을과 충돌하던 그 순간이다. 마을이 완전히 박살나는 그 장면은, 쿵하는 충돌의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끽해야 서너컷으로 보여지고 처리된다. 후반부로 갈 수록 영화의 개연성이 점점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뭐 설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라고 느꼈지만, 영화의 플롯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또 그 직전까지 관객의 애타는 긴장감과 조마조마함을 계속 쌓아올렸던 흐름을 감안한다면, 그 존재감 혹은 위상에 걸맞지 않게 이 순간이 처리될 때 느꼈던 기이함은 결국 영화에 대한 나의 최종감상으로 남아버렸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으러 걸어가면서 이런 저런 감상을 나누던 중, J는 이렇게 예쁜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수성 있는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 같은 역사 인식문제에 있어서는 왜 그렇게 둔감한지 모르겠다, 라는 말을 했는데, 나에게는 엉뚱하게도 이 말이 혜성 충돌 부분에서 느꼈던 기이함 혹은 찜찜함을 들여다보는 열쇠가 되었다. 급박하거나 허둥지둥하거나 아니면 무성의한 전환 지점들, 특히 몸이 바뀐다는 설정을 추동하는 사건이자 영화 속 그들의 세계에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기는 사건이 진짜 벌어지는 순간은 그냥 그렇게 짧게만 다뤄지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다다르는 지점은, 바뀐 미래를 평화롭게 (그러나 아련하게)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결국은 다시 마주보고 "너의 이름은!" 하고 외치는 우연의 해피엔딩. 이 영화를 보고, 아니 재난이라는 말이 호명될 때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현 시대 일본인은 아마 없을 테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국가적 재난을 겪은 일본인들의 심리적 상실을 어루어만져주었기에 영화가 대히트 한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한다. (한국에서의 흥행에 대한 반응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영화의 이런 "어물쩍스러움"이 쌓여 완성된 마무리를 곱씹을 수록, 이런 해석은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현실은 최소한으로만 잽싸게 보여주고, 죽음은 면하지만 마을을 잃은 미츠하가 도쿄로 건너와 안온하게 살고 있는 미래로 급히 넘어오는 전개는 결국 떨어지는 혜성의 궤적을 아름다운 광경으로 소비하던, 도쿄의 타키로 대표되는 외부인들의 부채감을 휘발시켜주는 수준에 머무는게 아닐까. 즉, 이 영화는 재난의 순간, 재난의 충격을 재현하는데에 있어서 (비록 그것이 영화의 진짜 목표가 아니라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바라보고 기억하는데 최소한의 노력만을 기울이며,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때문에 어쩔 수 없기는 하면서도) 그 복기된 재난은 낭만화 된 스펙터클로 재현되는데 그치며, 영화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소년이 머무는 곳에 소녀를 그저 이식해버리는 식으로 이 둘의 세계를 이어붙이고 이야기를 끝낸다. 그리고 이런 결말은 색색의 실을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엮어가는, 미츠하의 끈 같은 엮임이 아니라 힘주어 눌러서 그냥 이를 물려버리는 스테이플러 식의 봉합처럼 느껴진다. 



하기 싫은 일을 미루려고 몇 자 간단하게만 끄적거려야지 하고 시작했는데, 역시 생각이 난삽하니 글도 난삽하고, 시간도 훌쩍 지났네? 흐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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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월요일 조조.


여기저기서 난리길래 나도 보았다. 꿈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영화다, 정도에 대한 정보만 갖고.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거부감도 좀 있고, <비긴 어게인>처럼 음악 영화의 외피를 둘러쓴 뮤직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래도 <위플래시>를 만든 감독이니깐 좀 다를까 싶어서 봤는데... 역시 이건 뭘까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이었다. 호오가 뚜렷하게 갈린다는 반응도 이해가 갔고.


예쁜 도시에서, 예쁜 남녀가, 예쁘게 옷입고, 예쁘게 춤추고, 예쁘게 노래하고, 예쁘게 사랑하고, 예쁘게 성공하고, 예쁘게 헤어지고, 예쁘게 아련하고....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영화 참 예쁘게, 납작하게 만들었네, 하는 생각. 그리고 "perfectly manicured"라는 표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의 맨 처음이었던가, 아님 마지막이었던가. "Made in Hollywood"라는 인장을 화면 하단에서 분명히 보았던 것도 같고


처음에는 클리셰적인 캐릭터 설정이나 서사 흐름도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 영화의 내러티브 규칙을 따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럴 수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노래나 춤이 인상 깊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잘 만든 음악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내적 댄스를 추게 만든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지론인데, 이 영화의 춤과 노래는 장면이 끝나는 순간 그야말로 (이 영화를 수식하는 형용사들중 아마도 빈도가 가장 높았을 단어를 빌리자면) "마법처럼" 휘발되어 버렸다. (<비긴 어게인>은 멜로디가 catchy하기라도 했지... 심지어 극장을 나서면서 머리에 맴도는건 세바스챤이 알바로 일하던 밴드가 수영장에서 연주하던 a-ha의 "Take on me"였다. 빌어먹을 신디사이저여.) 이는 음악을 담당한 이의 실패라기 보다는 결국 실감나는 인물로서의 레이어를 결여한 캐릭터 설정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영화의 출발은 각자의 꿈을 쫓는 두 남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들이 왜 이러한 꿈을 희망하는지 이해하고 이를 응원하게 만드는 공감과 지지의 토대를 정밀하게 설계하는데 관심이 없다. 여주인공 미아가 오디션을 치루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데, 막상 그 순간 미아가 부르는 노랫말의 진짜 주인공이 미아가 아닌 미아의 고모/이모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미아의 꿈과 욕망은 미아의 것인가? 아니면 센 강에 몸을 던져보는 걸 주저하지 않을만한 열정의 소유자였으나 결국은 평범한 아동극단의 배우로 그치고 말았던 고모/이모의 것인가? 캐스팅 디렉터의 눈을 잡아 끌만한 미아의 1인극에 대해 관객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So Long Boulder City"라는 제목 뿐이다. 세바스챤의 꿈 또한 뭔가 핀트가 안맞는다. 잘나가는 밴드 리더(존 레전드가 갑자기 나와서 당황했다...)가 선뜻 탐낼만한 훌륭한 건반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은 (<위플래시>의 주인공의 꿈이었던) 일류 연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즈바를 여는 것이다. 또 레스토랑에서 징글벨을 치면서 재즈바를 열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음반과 투어가 보장되는 밴드의 일원으로 바짝 일하는게 당연히 더 나은 길이기에, 세바스찬의 시련은 그다지 안타까운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물들의 출발과 갈등과 성공은 모두 지나치게 얄팍하게 그려지고 손쉽게 처리된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빈약한 설계 또한 감독의 철저한 의도라는 점이다. 꿈과 인물에 대한 빈곤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테마, 즉 꿈과 사랑 중 전자를 선택하며 결말을 낸다. 이러한 결말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인, "What if?"의 모든 가능성들을 빠르게 훑는 마지막의 감흥을 오롯이 끌어올리기 위해 이 영화가 쉬임없이 달려왔음을 반증한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두 남녀가 한 때 꿈꿨고 간절했던 그 모든 낭만과 애틋함에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나 또한 그 장면에서 울컥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적 반응과 별개로, 영화를 곱씹을 수록 떨치지 못하는 꺼림칙함과 지나치게 편리하고 예쁘기만 했던 모든 서사적 장치들은 이러한 결말이 영화의 메인 서사를 "선남선녀의 완성되지 못한 애틋한 로맨스"로 위장해버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낳게 한다. 이 때 이 의심은, 로맨스의 본질을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허구로 정의해버리는 감독의 기이하고 슬픈 비관주의를 발견하는 이동진의 평과 그 맥이 닿아있기도 하다. 즉, 나의 불편함은 동화같은 장르적 문법의 외피를 빌려 감독이 이 비관주의를 철저히 숨겨놓았다는데서 비롯된다. 모든 이들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꿈의 공장 헐리우드는 꿈을 이뤄주는 조건으로 미아와 세바스찬에게 그들의 사랑과 삶이 결합되어 있는 그 도시를 떠날 것을, 즉 그들의 이별을 요구한다. (세바스찬이 집을 떠나 투어를 하러 다니면서 이들의 관계는 삐걱대고, 이들의 이별을 결정짓는 것으로 추정되는 원인은 미아의 파리행이다.) 이러한 결말과 설정, 그리고 작품의 서사와 화면을 구현해낸 방식에서 추론되는 감독의 태도랄까... 즉 먼지 한 톨 없이, 단지 결말의 아련한 인상을 위해 불필요한 디테일과 불균질한 결을 필사적으로 감추거나 생략해버리는, 철저하게 계산되어 꽉 짜인 그 인공적인 영화의 질감에서 감독의 인간관, 혹은 세계관이 무자비하고 비정하다고 느끼는건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일까? 괴물 같은 선생 밑에서 그 제자마저 괴물로 완성될 때, 마치 그 순간을 긍정하는 듯한 여운을 주며 끝나버리는 <위플래시>는 서사와 표현방식이 감독의 이러한 면모와 솔직하게 결합되어 드러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으나, <라 라 랜드>는 이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곡성>에 대해서 "위로가 되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는 나홍진의 인터뷰에서 느꼈던 당혹감과 불편함이 떠오른다. 도대체 그 출구 없는 절망의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어디에 존재했던가.)


인상적인 롱테이크로 완성된 영화의 시작이 지나간 뒤, (엄청난 리허설을 통해 완성되었을 이 군중 씬에도 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익숙치 않은 시네마스코프의 비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화씨 80도가 넘는 캘리포니아의 햇빛 아래 한참 서있었던 차들의 본네트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맨살을 대고 춤춰야했던 댄서들의 피부를 걱정한 나의 오지랖 때문이기도 하다...) 미아가 차에서 연습하는 대사는 감독이 관객에게 건네고 싶었던 메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아는 "It's pure insanity"라고 연습하다가, 정확한 대사는 "insanity"가 아니라 "lunacy"임을 확인한다. 본래 말하고자 했던 단어, 그리고 이 두 단어 간에 놓인 교환 가능성(interchangeability)은 영화에서 상충되는 꿈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해석의 방향을 제공해주지 않는가? 미아와 세바스챤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첫 키스를 나누는 시간은 모두 달이 떠있는 밤의 시간인데 비해, "너를 영원히 사랑할거야(I'm always gonna love you)"라는, 필연적인 이별의 예감을 부정하지 않는 이 말을 주고받는 순간은 밤의 마법이 사라진 한낮이다. 차올랐다가 기울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그 형태가 결코 고정되지 않는 달처럼, 두 연인의 로맨스는 혹은 그들의 로맨스를 지탱하는 환경과 조건은 영원히 그대로 지속되지 않는다. 감독이 구축한 <라 라 랜드>에서 사랑과 꿈 모두가 이루어지는, 마법같고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은 "정신나간"(insane) 짓이다. 





*이 영화에 대해 쓴 글 중 (아직 다섯 편 정도 밖에 안 읽어보았지만) 가장 신랄한 평은 Richard Brody의 글인것 같다. 제목부터 "The Empty Exertions of La La Land".


**얄팍하고 납작한 이 영화가 사랑 받는 이유는 결말의 한 방이 물론 제일 클테지만,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의 캐스팅도 적절하다. 아이폰을 쓰는게 종종 어색하게 느껴질만큼 현대성이 거세된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하는데는 인물들의 의상도 한 몫하는데, 거적대기를 입어도 필히 스타일리쉬 해보일 기럭지의 소유자 엠마 스톤이 레트로 느낌이 물씬나는 드레스들을 연이어 입고 나오는 것도 눈이 즐거운 포인트이다. 거기다가 예의 "사랑에 실패해 쓸쓸하고 아련한" 남주의 얼굴은 라이언 고슬링이 배우로서 구축해놓은 자산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터. 


***영화를 지배하는 푸르스름하고 보라색이 섞인 하늘의 풍경은 너무 예쁘다. 9월의 magic hour를 기다려서 찍었다는 이 전경을 실제로 보고 싶다. 나 LA도 갔었는데, 왜 그리피스 천문대도 못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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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일요일 오전 열한시 삼십분에 관람. 



첫 인상은 영영 볼 수 없게 된 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이야기, 이정도 였다.


일본영화 특유의 정서? 공기? 같은 부분은 숨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가 있다. 일본어 특유의 재잘대는 듯한 리듬으로 조곤조곤 말하면서 조신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두손으로 찻잔을 잡고 있는 여성이 화면에 등장할 때는 솔직히 짜증까지 난다. (여자들끼리 그러고 있을 때는 여자들끼린데 좀 편하게 앉아있으라고! 하는 생각이 들고, 남자와 그러고 있을 때는 남자는 편하게 양반다리 하고 있는데 너는 왜 무릎에 굳은살 박고 있냐! 싶고. 물론 이건 하루의 대체를 누워 보내는 나같은 인간이 갖는 이상한 심통일 것이다.) 십대나 이십대 초반까지는 그런 정갈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꽤 근사해 보였는데 (일본 소설들을 열심히 읽던 때와 일치한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꾹꾹 눌러대는 것이 좀 질리기 시작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가 나쁘지도 않지만, 딱히 그렇게 좋은 점도 잘 모르겠다 싶었던 것도 이런 정당하지는 않지만 떨칠 수 없는 이유 없는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회사 선배가 영화도 보는게 어떻냐고 해서 별 기대 없이 보러 갔고, 사실 영화 중반에 너무 피곤해서 잠깐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교과서대로 잘 만들었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정한 구도, 사물, 음영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수미상관 식으로 여러번 등장하는, 역시나 정갈하고 질서정연하게 깔려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주인공의 시점샷이 바다에 물질하러 나가는 이웃집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점샷으로 연결될 때, 나는 그 할머니가 살아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상실과 "치유"에 대한 영화라고 홍보했으니까) 혹시나 반대의 경우가 되면 어쩌나 하고 염려했다. 여자에게 약속한대로 꽃게인지 문어인지를 정확하게 가져다준 할머니에게 불사신 어쩌구 하는 대목도 예상가는 대목이었지만 쉽게 감동하는 나인지라 이것 또한 예상대로 뭉클했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왜 들어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이 할머니와의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 아니었을까. 무언가에 홀린듯 장례 행렬을 좇아, 검푸른 바다와 땅의 경계가 아슬아슬한 그 곳에 선 여자를 발견하게 되는 그 장면에 이르기 위해. 


어째서 누구는 영원히 부재하게 되고, 누구는 웃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가. 그리고 그 부재의 영역으로 걸어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당연하지만, 영영 사라진 자 혹은 죽은 자에게 그 답을 들을 수 없기에 완벽한 미지로 남고 그렇기 때문에 남은 자의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마지막 뒷모습인지도 모르고 헤어진 할머니와 남편처럼 돌아오지 못할까 전전긍긍했던 옆집 할머니의 무사귀환이 있고 나서야 여자는 남편의 자살을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던, 하지만 그걸 결코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할 수 없었던 울음 섞인 질문을 터뜨려낸다. (도우시떼!)


치매에 걸려 사라진 할머니와 뒤에서 맹렬히 달려오는 기차 소리에도 선로를 벗어나지 않은 남편이 설령 여자에게 돌아오더라도 그들조차 자신들이 그렇게 사라져야만 했던 이유를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구나 어떤 빛에 끌려버리고 마는 순간들이 있다는 남편의 대답은 일견 이 무겁고 괴로운 질문의 대답으로 한없이 불충분해보이지만, 역으로 삶의 불완전성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그럼으로써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의 어둠과 자기장에서 빠져나오는것이 결국은 중요한 일임을 드러낸다. 남편은 집에 가자고 한 뒤 몸을 돌려 원경의 프레임 바깥으로 나아간다. 그의 몸짓은 여자의 손을 잡아 끌기 위해, 하다못해 여자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불필요한 제스처를 취하지 않으며 여자가 자신의 발걸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그녀와의 거리를 그대로 유지한다. 클라이막스의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을 잡는 대신 먼 곳에서 이 어둡고 아름다운 바다와 연기와 하늘을 조망하는 이유는 여자와 남자의 이 거리와 방향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영화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여자의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남자와 그의 딸의 즐거운 모습이 등장하고, 남자의 아버지는 환한 빛으로 가득찬 이 풍경을 바라보며 좋은 계절이 왔다, 라고 했던 것 같다. 검은 옷 대신 처음으로 하얗고 푸른 옷을 입은 여자는 (예의 그 특유의) 정갈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기며 시아버지 곁에 서 있고. 요즘처럼 빛이 폭력적일만큼 강렬한 계절이 아니었다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이 이야기를 더 너그럽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무렵 찾아보면 더 좋을 것 같은 영화다. 



*역시 일본은 섬나라라 그런가. 그들의 해안선이 뿜어내는 고유의 아름다움과 에너지는 매혹적이다. <아가씨>에서도 그랬고. 그에 비해 한국 영화의 자연은 바다보다는 역시 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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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 2016년 7월 21일 



- 머리만 식혀주면 된다, 라는 애초의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게 봤다. CG의 만듦새, 지나치게 짜맞춘듯한 인물 설정과 조합, 후반부의 늘어짐 등등, 단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2016년의 한국이라는 리얼리티가 영화에 조밀하게 또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강점 아닐까. 세월호와 메르스 같은 거대한 사회적 인장은 물론이거니와, 포털 실시간 검색어로 '좀비'라는 단어를 보여주는 방식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감염자들이 덮치는 한가로운 풍경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청년들이라는 작은 장치들까지. 한 가지, 영화를 보다보면 누가 죽고 누가 살지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재난의 상황에서 고등학생들이 죽는 것은 특별히, 어쩔 수 없이, 더 슬프다.  



- 일상적 경험에의 인식에 균열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영화 표값인 만원 한 장의 효용으로는 충분하다는 기준에서도 좋은 영화였다. KTX 탈 일은 없으니, 당분간은 지하철 칸 사이의 문 사이로 누군가가 넘나들때 쳐다보게 될 것 같다. <괴물>을 보고 난 뒤에 한강 다리와 고수부지가 결코 전과 같아보이지 않듯(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고 <괴물>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 생각없이 스치던 일상의 공간이 그로테스크한 재난의 현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나의 일상은 좀더 불온해지고 은밀해질 수 있다. 



- 그러고보면 지하철에서 다른 칸으로 이동할 때 문을 여는 방식이 열차마다 다르다. 손잡이를 직접 잡고 약간의 힘을 써서 돌려야 하는 방법과 그냥 버튼을 누르는 방법. 근데 내가 타는 5호선은 거의 전자인듯? 그동안은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찝찝해 했는데 앞으로는 문 여는 방법을 모르는 좀비들이 저쪽 칸에 득실거린다면 뭐 이정도 수고쯤이야,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히말라야>에 이어 이번에 정유미가 맡았던 역 또한 그저 그렇게 휘발되기 좋은 역 아닌가 했다. 물론 설정 자체에서 오는 한계, 구조와 보호의 대상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점은 아쉽지만. 그녀가 배우로서 가진 고유한 힘이 대규모 상업영화에서도 생각보다 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고착화 되지는 않으려나 하는 (내가 하기에는 쓸데없는) 우려도 들지만. 



- 그간 턱 없는 곤충형 얼굴이라며 공유가 멋있다는 생각은 잘 안 했는데, 이번 영화보고 좋아졌다 히히히. 하지만 30대 후반(추정) + 펀드매니저 (밥먹을 시간도 없어서 책상에서 버거와 콜라를 먹는다) + 유부남 (이건 추가적이긴 하지만, 여튼) = 그런 날렵한 허리선? 이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등식이다. 



- 수안이도 너무 매력 있다. 까만 피부, 까만 속눈썹 안에 가지런히 자리잡은 까만 눈동자, 자동으로 쓰다듬고 싶어지는 까만 머리칼. 앞으로 그 까망까망함 잃지 않고 잘 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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