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9 일요일. 

 

- 인스타에 그런 계정이 있다. 뉴욕 거리에서 지나가는 남녀를 붙잡고 Are you guys a couple?하고 묻는. 어떻게 만났냐는 후속 질문이 나오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어떤 아시안 커플이 나오는 릴스를 H가 공유해주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악세사리와 옷차림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도 정기적으로 손질받는 것이 300% 확실한 헤어를 하고 있었으며, 99%의 대답을 여자가 했다. 보통은 인터뷰이가 처음 만난 이야기를 마치면, 진행자의 다음 질문은 상대방에 대해서 가장 좋아하는 점이 뭐냐는 것인데, 이 컨텐츠에서는 뜬금없이 In-Yun이 뭔지 아냐는 질문이 나왔다. 여자는 Of course, I am Korean 하면서 또 대답을 술술. 갑자기 이 질문은 뭐지? "이거 너무 광고 느낌나는데?"하고 답을 하는 찰나 J의 인스타에 #pastlives라는 캡션이 달린 게시물이 올라왔다. "J야, past lives 이거 밈이야? 비슷한 컨텐츠가 갑자기 많이 보여" "아, 이거 영화에요!" 그렇구나. 찾아보니 코리안아메리칸 여성 감독의 영화다. A24가 제작했고 유태오가 나온다네? 마침 동네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H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거 인연 어쩌구 하는거 past lives라는 영화에서 나오는거 같아. 찾아보니까 동네에서 상영하는데 주말에 보러갈래?"

 

- 점심부터 몰아치던 비바람이 집을 나서기 직전 말끔하게 잦아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고 극장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리기 직전 다시 시작된 비와 바람의 콜라보. 우산으로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에서 딱 서른 걸음 정도를 걷고나니 온몸이 다 젖었다. 으슬으슬 떨며 축축한 채로 극장에 입장. 

 

- 서로에게 어린 시절의 스윗하트였던 노라와 해성이 노라의 이민으로 헤어졌다가 성인이 되어 재회한다는 큰 틀에 따라 영화는 흘러간다. 피날레에서도 극적이고 열정적인 재결합의 카타르시스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잔잔하고 소박한 종결을 내놓는다. 사실 이 둘의 재회는 근본적으로 닝닝한 탄산수 같을 수 밖에 없는게 태평양을 사이에 둔 각자의 다른 시공간이 결국은 서로의 공통분모를 어린 시절 공유한 추억으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두 인물의 재회가 일어나는 물적 조건과도 그대로 일치하며, 따라서 첫번째 reconnect는 온라인, 두번째이자 최종적인 물리적 재회가 일어날 때 쯤에 노라는 이미 기혼이 된다.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은 했으나, 딱히 감정적으로 감흥이 일어나거나 영화의 중심인 노라 캐릭터에 몰입이 되지 않았는데, 그건 이 영화가 애초에 타겟하고 있는 사람이 나처럼 이주의 경험 없이 성장과정을 거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차라리 유태오 캐릭터가 그나마 나와 비슷할텐데, 어쨌든 영화는 노라를 제외한 캐릭터를 거의 빌드업하지 않는다) 노라와 태성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초반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읭? 하는 질문이 떠다녔는데, 한국 나이로 열두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남녀 아이들이 저렇게 순수하고 솔직하게 교류한다고? 아닌가 예전에는 저랬나? 낭만화되다 못해 거의 sterilized 된, 비현실적 묘사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20대 이후에 노라의 삶이 흘러가는 부분부터는 그냥 감독 자신의 삶을 가져다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부분이 묘하게 걸리적거렸다. 예술가를 꿈꾸는 동아시아 이민 1.5세대 여성으로서 감독이 밟아왔던 인생의 궤적이 예측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으로 간명하게 훑어지는데, 이 "훑어지는" 내용과 방식을 자꾸 곱씹게 되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노라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거치는 고민이나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으며, 이러한 부분을 보여주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떻게 보면 완전히 성장한 노라라는 인물의 설정값을 보여주고 거기까지 이야기를 전진시키는데에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포커스는 어디에 가 닿아있는지를 다시 질문하게 되고... "인연" 그걸 그리기 위한거야?) Playwright이 되고 싶다는 꿈에 따라 뉴욕으로 이주하고, 특정한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고, 그 과정에서 만난 동료 남성(미국인이고 백인이다)과 결혼하고... 노라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은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혹은 검증된(tried-and-true) 과정들을 차례로 밟아나가는(아직도 가장 whitish한 예술창작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코 연극계일 것이다), 주변부 출신의 마이너리티 여성이 내릴 법한 삶의 결정들에 대한 보편화된 지식을 동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기대고 있는 이같은 자전성과 전형성의 손쉬운 교환 혹은 등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관계 안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오래된 길항의 축 위에서 알맞은 균형점을 찾고 그 고유한 위치성을 미학적으로 재현하는 노력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전형성 때문에 영화는 차라리 1.5세대에 대한 Ethnography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코리안 아메리칸, 혹은 다른 hyphenated identity의 소유자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또 내가 미적지근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하는 추정. 

 

- 아시아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어떤 경향성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 중 하나는 modesty가 아닐까. 혼종성과 과잉의 기치를 전면화 하면서 장르 영화의 전통과 문법에 대한 이해를 각자의 방식으로 비트는 영화들이 컬트적으로 소비되는 한켠에는 (출산을 하기 전)곤도 마리에의 얼굴이 대표하는 미니멀리즘처럼 야심과 에고를 제거한 소박한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채택한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도 후자에 속하는데, 이러한 절제와 단순함의 "갬성"이 어필하는 관객층이 누굴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에서 이상하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노라가 나중에 남편이 되는 인물을 처음 만났을 때 인연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주면서, 사실은 이거 한국 사람들이 "seduce"할 때나 하는 말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의도된 웃음포인트이면서 동시에 이 말을 내뱉는 노라와 이를 듣는 미래의 남편을 짝으로 묶어 이번 생의 연인으로 이들의 인연이 정의되는 순간. 그런데 이 대사는 마치 영화가 전생이나 인연이라는 말이 낯설게만 들리는 미국 관객을 "꼬시려는", 이 영화의 포지셔닝에 대한 메타 코멘터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인 Past Lives는 노라와 해성이라는 두 사람만의 관계를 이성애적인 것으로 국한하지 않으려는, 더 폭넓고 연속적인 관계성에 대한 작품의 지향을 암시하지만, 그 목표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으로 성취되는가? 영화에서 전생과 인연이라는 개념은 결국 이성애적 관계의 완성 혹은 실패(하지만 다음에의 기약이라는 가능성이 잔존하는)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만 이해되고 제시되고 있지 않는가. (이런 면에서 노라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태성과 남편만이 바에 남아서 "우리도 인연이다"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은 흥미롭지만 짧게 스쳐지나가며, 한편으로는 이 둘이 노라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인연이 된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관념조차도 페티시화 되어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이 너무나도 손쉬워진 시대, 지나치게 과시적이지 않아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계급적 안락함과 성공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소위 tasteful한 외양의 아시안 커플에게 past lives와 in yun을 물어가며 영화를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숏폼 컨텐츠에 함의되어 있는 레이어들은 얼마나 무수한가. 영화는 시작하는 장면으로 노라의 양편에 해성과 미국인 남편이 앉아 있는 바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이 셋의 대화 대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셋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유추하는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를 보이스 오버로 들려준다. 관객이라는 관찰자의 포지션과 관찰 대상의 구도를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이러한 시작은 (영화의 의도는 결코 아니었을) 결국 영화에서 전생과 인연이라는 관념이 신비롭지만 예쁘장하고 안전한 소비재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혐의와 맞닿아 있는것 같다. 

 

- 유태오는 평범한 한국의 엔지니어 회사원을 연기하기에는 너무 잘생겼고 가슴도 너무 빵빵하다. 

 

- 이 영화에서 절제되어 있는 다이얼로그를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성인이 된 노라와 해성이 다시 만날 때, 둘이 보여주는 대화는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에서 그리는 남녀의 폭풍 수다(flirt와 learning이 혼합되어 있는)와 분명히 다르다. 새롭게 뿌리 내린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 K 장녀로서 부모님의 몫까지 의사소통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다 보니 노라의 한국어가 지워진걸까? 아무리 그래도 한국에서 그만큼 초등학교 다니고 갔으면 한국어를 그거보단 잘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자주 끊기고, 침묵이 많으며, 느릿느릿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skype의 배드 커넥션과 시차와 성장 배경으로 인한 언어적 능숙함의 차이로 이 메워지지 않는 틈이 생겼다고 봐야할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화가, 그리고 관계가 결코 끊기지는 않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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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부터 하나씩 뜨던 트레일러, 개봉을 코앞에 두고 공개된 라이언 고슬링의 솔로 발라드와 빌리 아일리시 뮤비를 그룹챗에서 공유해가면서 기다렸던 그 영화 바비. 개봉일이 겹친 놀란 영화까지 함께 묶어서 Barbenheimer라고 미디어에서도 잔뜩 뽐뿌를 넣었던 7월 21일 금요일. 때마침 한국은 중복이었고, 매주 각자의 집을 오가면서 나누는 친구들과의 식사를 호스팅 한지도 꽤 되어서 "영화 보고 우리집에서 한국에서 서머 푸드로 먹는 치킨 수프 먹자!"를 힘차게 제안. 아침에 수영을 하고, 집에 와서 국물이 넉넉하게 삼계탕을 끓이고 로메인 상추로 겉절이 할 준비까지 다 완료해놓고 4:45 상영 시간 시간에 맞춰 극장에 갔다. 어딘가에 하나씩은 핑크 아이템을 착장한 (나는 동생이 던져주고 간 마젠타 핑크 스크런치로 간신히 드레스 코드를 때웠다...) 사람들,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애들 무리, 십대쯤 되는 딸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등으로 로비가 북적거렸다. 이쯤되면 뉴진스의 하입보이가 아니라 그레타 거윅의 하입바비다. 

 

- 영화는 feel-good movie로서의 소임에 충실하다. 영화는 바비와 켄의 우당탕탕 인간 세계 탐방 버디 무비의 플롯을 따를 것이라는 내 예상에서 비켜나는데, 이러한 탈선은 바비와 켄이 각자의 awakening을 통해서 주체성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의 결말로 이어진다. 내가 느끼는 이 영화의 아쉬움은 사실 이러한 예상 및 탈선과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둘의 버디 무비가 될 것 같다는 예상은 영화가 개봉 직전까지 순차적으로 쏟아낸 트레일러를 시청한 결과인데, 문제는 트레일러 이상으로 영화가 인상적이거나 재미있는 순간을 담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모든 시퀀스들이 조금씩 루스하다는 인상이 들었는데, 이러한 느슨함은 마치 바비가 두려워하는 셀룰라이트처럼 점차 누적되어서 후반부에 가면 울퉁불퉁하고 어글리한 과잉을 낳는다. (윌 패럴의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가장 이 영화에서 디벨롭이 덜 된 캐릭터를 뽑는다면 만장일치로 그가 지목될 것. 그가 이끄는 검정 수트의 남자들은 플롯의 진행과 주제의 심화라는 양 측면에 거의 기여를 하지 못한다) 또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켄에게도 각성과 성장을 부여하는 영화의 큰 줄기는 "바비"라는 영화의 타이틀을 다시 써야 하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It's always Barbie, and Ken이라는 켄의 한탄이, 역설적으로 바비랜드와 영화 안에서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증언이 되어버린 셈. 쉽게 말해서, 켄의 솔로무대가 그렇게까지 길 필요가 있었을까? 바비들에게 부여되었던 전반부의 군무씬은 바비의 malfunctioning에 의해 짧게 끝나버리는 반면 켄들의 군무씬은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플레이 아웃되며, 영화의 홍보 컨텐츠들을 충실하게 소비해왔던 입장에서 이 신은 너무 길게 느껴진다. 물론 트레일러와 선공개 장면들을 보지 않은 관객에게는 이 부분이 신선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켄의 존재론적 성찰을 이렇게까지 친절하고 충실하게 전면화 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언제나 켄 그 자체가 아니라 바비의 남자친구라는, 파생적인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열등감은 이미 바비와 분리되어 그가 벌이는 소동의 추동 요인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나 싶은데 거기에 캐릭터를 맡은 배우가 직접 노래하는 장면까지 몇 분간 넣어주니 영화의 추는 켄 쪽으로 확 기울어버린다.

 

- 더 큰 아쉬움은 영화가 보여주는 페미니즘이 납작하다는 데서 온다. 영화는 가부장제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희화화 하는 것만큼이나 페미니즘의 의미와 표현을 사소화 한다. 바비들이 어떻게 세뇌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재하고(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바비들이 세뇌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되돌리는 것 또한 너무 쉽고 허망하다(얼굴 붙들고 스피치 한번 하면 끝?!). 크게 공들여 설명되지 않고 그저 플롯의 진행으로서만 어물쩡 넘어가는, 가부장제와 페미니즘이라는 서로 대척하는 이데올로기적 레짐의 손쉬운 전환은 결국 바비랜드라는 설정의 인공성과 허구성에서 비롯된 태생적 한계를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억압성과 한계를 노출하고 격파하기 위한 페미니즘이 결국 구조와 시스템, 정치의 문제인 것에 비해 영화가 플롯의 대단원에서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각성과 선택이다. 영화의 이같은 페미니즘 101적인 결말은 personal is political을 부르짖었던 초기 세컨 웨이브 페미니즘의 한계와 공명하는 것은 아닌지. 1959년에 태어난 바비를 2023년의 감각으로 재포지셔닝 한다면, 적어도 60년대 수준의 논의보다는 더 다층적인 이야기를 담아야 하지 않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한계는 결국 바비라는 IP를 새롭게 브랜딩해서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바비 유니버스의 플라스틱 가공물을 팔기 위한, 마텔 프로덕션이라는 영화의 근본적인 출발과 무관하지 않다. 지갑으로 키운다는 말에 함의되어 있는 소비주의의 위험성에 특히나 더 민감한 사람으로서 영화에서 가장 아이러니하고 웃긴 대사는 Mattelfucker가 된다. 

 

- 4:45 영화가 시작한 시간은 5:06이었는데, 이 말인 즉슨 20분도 넘게 어처구니 없는 다른 영화들의 광고를 견뎌내야 했다는 것이다. 과연 저만큼의 자본을 들여 저런 서사를 생산해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의 트레일러들이 한없이 이어지자 친구들과 손목을 탁탁 짚어가며 눈알을 굴렸다. 풍부한 대화와 다채로운 감정을 일으켜주는 좋은 대중 영화를 만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참 어려워졌다. 다수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안전한 내용과 검증된 양식만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매체만이 선사할 수 있는 정서적, 감정적 고양의 경험이 너무 귀해졌다. 아님 그냥 내가 늙고 불평만 많아진 걸까. 

 

- 말그대로 통닭인데 잘 발라먹을 수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 무색할만큼 친구들은 그릇에 코를 박고 삼계탕을 먹었고, 국물까지 싹싹 비워주었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집이 덥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비가 와서 더위가 가신 덕에 선풍기만 돌렸는데도 모두가 쾌적하고 즐겁게 밤을 보냈다. 이렇게 중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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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창밖을 보니 눈이 펑펑 오길래 나가려던 계획을 캔슬하고 칩거를 선택했다. (뭐 언제는 집밖에 그렇게 나갔다고!)

살다보면 뉴욕쯤은 또 갈 수 있겠지. 그때는 꼭 링컨 센터에 가서 NYCB 공연을 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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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 토요일, 19:10. 집 앞 CGV.


- 히든 피겨스, 계속 봐야지, 만 하다가 이제서야 봤다. 영화에 대한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영화의 기본적인 만듦새는 평이하다고 느껴졌다. 하긴, 평이하다고 느낀것도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주인공이 세 명인 셈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다 끌고 가면서 무너지지 않고 엔딩 크레딧까지 무사히 도달하니 그것 자체가 이미 성취일지도. 


- “알려지지 않은 숫자들”을 찾아내었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 (Hidden figures were figured out by hidden figures.) 영화 제목만으로도 줄거리 설명이 가능하며, 사실 이 제목 자체가 의미하는, 그러니까 소재 자체의 희소성이 이 영화를 견인하는 힘일 것이다. 흑인 여성 수/과학자들에 대한 영화라니. 그것도 1960년대에. 흑인 남성 퀴어 영화보다 100배쯤 귀한 소재다. 


-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아무래도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의 장면들. 특히 두 장면이 좋았다. 첫번째는 아무렇지도 않게 IBM의 연결을 바로잡던 씬. 남성들이 정복하지 못한 기계의 전원을 켜는 것은 미리 포트란 언어를 공부한 도로시이며,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컴퓨터”로 일하는 동료 여성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교육시키고, 마침내 때가 오자 멋지게 진짜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행진한다. 두 번째는 '나 너한테 악감정 없어'라고 말하는 비비안(커스틴 던스트)에게 '넌 그렇게 믿고 싶겠지'라고 조용히 대꾸하던 부분. 자신 안의 인종주의를 들여다보지 않는 이들에게 날리는 우아하고 정중한 일격. 




- 미국 백인 남성의 프라이드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얻어내는 메리(자넬 모네)의 전략은 흥미로우면서도 아슬아슬한 지점이 있다. 영화의 장면, 고장난 차를 고치고 있는 여성에게 다가오는 백인 경찰관. 그는 세명의 흑인 여자들이하늘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빌어먹을 러시아 놈들 대항할, 미국의 희망인 나사에서 일한다는 알자 태도가 슬쩍 바뀐다. 그의 태도가 바뀐걸 간파한 메리는 얼른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캐서린을 저지하고 그를 구슬려서 경찰차 뒤를 신나게 달린다. “Three negro women” 백인 경찰을 뒤쫓고 있다고, 그것도 1961년에 말야! 라고 환호하는 메리.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뒤에 흑인의 수강을 허락하지 않는 학교에서 엔지니어가 되는데 필요한 수업을 듣고자 법원에 청원하는 장면에서는 약간 기분이 복잡해졌다. 메리가 판사를 설득하는 전략은 백인 남성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방식이랄까. 도로시가 커스틴 던스트에게 정중하게 하지만 따끔하게 지적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판사에게니가 판결을 내리는 결국 너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일이야라는 식이다. 판사님, 당신은 언제나 첫번째였고, 최고이며, 나에게 수강권을 허락하는 일은 당신의 가치를 높이는 작업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전략은 결과면에서는 성공적이다. 메리는 결국 수업을 듣게 되니까. 하지만 메리의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는? 과연 그가 메리 이후 유사한 사건을 맡게 ,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결정의 이유는 뭐가 될까


- 이런 고민은 결국 영화가 갖고 있는 능력주의의 함정과도 연결된다. 흑인 여성들이 끝내 성공을 이룰 있었던 것은, 결국 그들이 그럴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캐서린(타라지 P. 헨슨)의 상사인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정말이지 얄밉게 나오는) 셸든 쿠퍼, 아니 셰퍼드(짐 파슨스)에게 하는 , “여기에는 천재들이 많고, 임무는 천재들 중에서도 천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천재로 하여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일이야 대충 이런 말인데. 캐서린이 일하는 방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셔츠와 검은 넥타이를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눈초리를 보내는 수십명의 백인 남성들 일부는, 분명 캐서린만큼 뛰어나지 않아도 운좋게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캐서린은 결국 천재 중에 천재였고, 그런 의미에서, 비록 흑인 여성이라는 이중의 꼬리표를 달고도, 어떻게든 두각을 나타낼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지점이 묘하게 껄끄러운 , 최근 유나이티드 항공 사건을 둘러싼 반응들 , “남성이며 전문직인데,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저런 취급을 받는다는게 충격적이지만, 남성도 못되고 전문직도 못되는 아시아인인 나는 과연 어떤 취급을 받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여성들의 의견을 읽고 매우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맥락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알랭 보통 또한 <불안>에서 현대인들의 불안을 야기하는 다섯 가지 원인 성과주의 뽑았다. "If the successful merited their success, it necessarily followed that the failures had to merit their failure... Low status came to seem not merely regrettable but also deserved." 네, 저는 성과주의의 잣대에서 탈락한, 문과생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능력은 결국 미국의 이익을 공고히 하는데 쓰여지지 않는가. 다시 백인 경찰관이 도로시와 캐서린과 메리를 에스코트 해주던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가보자. 경찰관이 이들의 직업을 알고나름 우대해주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세 여성의 출근길을 에스코트함으로써 자신 또한 미국이 선취해야  우주 정복이라는 거대한 국가적 과업 달성에 기여하는거라고 믿는 알량한 성취감과 애국심의 충족일게다. 하지만 미국 시민의 안전을 수호하는 경찰로서 그가 하는 일은 고작 차가 고장나서 곤경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지고 말대꾸를 한다며 면박을 주는 . 소수자에게 있어, 유리천장을 뚫고 자기 실현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 실현되어야 평등, 그리고 부당한 검문을 당하지 않거나 혹은 비행기에서 피흘리며 끌려나오지 않는 일상의 안전과 기본적인 존중, 중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바보같은 질문이다.) 정리하자면, 여성들이 이뤄낸 업적은 정말이지 대단하지만, 업적이 궁극적으로 강화한 것은 무엇인가? Make America Greater than Russia? , 그리고 그들은 오바마의 후임자로 트럼프를 뽑았습니다


숨겨진 숫자 로켓의 재진입 위치를 계산해낸 캐서린의 놀라운 업무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쓸모가 다하자 원래의 “컴퓨터 돌아가게 된다그러니까 원청업체에 파견나온 하청업체 직원은 결국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계약 종료가 되면서 원래의 신분으로 강등되는 것이다그런 그녀에게 해리슨이 선물하는 진주 목걸이부정의한 시스템의 결손을 메꾸는  결국 그런 개인의 선의인걸까. ( 대목에서는 언뜻 장강명의 단편 <알바생 자르기> 겹쳐지네그것마저도 능력이 엄청나게 좋아야 하고 능력을 알아봐주는 상사를 만나야 한다는노력과 운의 확률이 서로 곱해진그러니까 더더욱 작아지는 확률에 기대야 한다니.


지워져 있던 흑인 여성 과학자들을 조망한다는 영화의 대원칙에 따라 1960년대 민권운동의 피튀기던 페이지들 또한 가볍게 스쳐지나간다. (메리의 남편이 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Freedom Riders 테러 사건도 언급되는데이에 대해 메리는 애들이 이런걸 봐서 뭐가 좋냐는 하지만 1965 셀마 행진은 영화의 배경인 61-2년과 불과 3 차이일뿐영화 <셀마>  영화의 화면 톤만 비교해봐도  영화의 지향점이 얼마나 다른지   있다헌법이 보장하는 투표권의 행사를 방해하지 말라며 목숨을 걸고 행진했던기본권조차 피를 흘리며 얻어내야 했던 인종적 집단의 역사적 현실을 반추하는 영화그리고 능력있지만  존재가 지워졌던 개인들을 꾸준히 발굴해 내는 영화… 모두  필요한 영화들이다그리고 할리우드는 아시안 아메리칸이 주인공인 영화를 과연 언제 만들까만들기는 할까?


- Freedom Riders 관련해서 하나 덧붙이자면, 케네디는 당시 테러 사건에 대한 뉴욕타임즈 1면의 보도를 보고 백악관에서 민권 이슈를 담당하던 보좌관에게 전화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Can’t you get your goddamned friends off those buses?” 그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바로 3 흐루쇼프와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자유와 평등을 누린다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소련한테 그 실체가 들켜서는 안되는 더러운 빨랫감 같은 것. 이러한 일화는 1960년대 민권 운동이 정치적 탄력을 받을 있었던 이유가 결국 냉전 시대의 라이벌인 러시아에 대한 미국 나름의 민주 체제 선전, 혹은 체제 미화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역사학자들의 해석과 연결되며, 이는 다시 앞에서 말한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 강화 작업에 복무하는 수단으로서의 능력주의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 그래도 영화가 선사하는 쾌감은 역시 멋지게 차려입은 흑인 여성이 분필을 쥐고 당당하게 칠판에 수식을 적어내려가는데 있다. (그것도 번씩!) 특히 프로토콜이 허락하지 않는 펜타곤 회의에 해리슨은 캐서린을 데리고 들어가면서 그녀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지만, 회의 그녀는 필요한 숫자를 대답해내지 못하는 대신 입을 열며, 그런 캐서린에게 해리슨은 결국 분필을 건네준다. 시퀀스는, 그래서 해리슨이 화장실 표시를 때려부수는 장면보다 짜릿하다. (화장실을 때려부수는 것도, 삐딱하게 보면 결국 캐서린의 업무 시간 손실이 맘에 안들어서다. “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라는 대사는 남았다만.) 뭣보다 분필... 프로이트적으로 해석하자면 캐서린이 실컷 쓰고나면 닳아서 조그매지는








*하루에 수만판씩 바둑을 둔다는 AI의 이름을 유치원생도 다 아는 2017년의 관객에게, 영화가 선사하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어쩌면 사람=컴퓨터였던 시절일지도. 컴퓨터를 들이기 위해 문짝을 뜯어야 했던, 그리고 그 전원을 몇 날 며칠 켜지 못했던 그런 때가 불과 반 세기 전이었는데, 이제 컴퓨터는 다른 의미로 다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한 때 컴퓨터는 말그대로 계산하는 인간, Compute의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건만, 이제 그 컴퓨터는 인간의 지능을 흉내내어 바둑을 두고, 의학 진단을 하며, 법원 판결을 내리고, 소설까지 쓴다. 혼자서 3D 영화도 만들어내는 거 아냐 이러다가.  


**영화 관련해서 찾아보다가 여성이 인간 컴퓨터로 일했던 역사는 나사 이전에도 있었다는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19세기 말, 하버드 컬리지 천문대(Harvard College Observatory)에서 여성들을 고용해서 천체 이미지 분류 작업을 시켰는데 그들은 남성들만큼이나 퍼포먼스가 좋았다고. 또 그 중에서 윌리아미나 플레밍(Williamina Fleming)이라는 여성은 만 개가 넘는 행성의 분류법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또 그 과정에서 백색 왜성의 존재를 처음 알아챈, spectrograph 분야의 개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세 배우를 위해서라도 앙상블 연기상 같은거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문라이트에 이어, 자넬 모네의 연기를 보는 게 특히 더 즐거웠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통해서도 자신이 아티스트로 지향하는 가치를 멋지게 실천하는 아이콘. 사실 이름만 알았지 음악은 그동안 거의 몰랐는데 영화보고 유튜브에서 찾아보다가 Q.U.E.E.N.이라는 엄청나게 멋진 비디오를 발견했다! 자넬 모네에 에리카 바두의 지원사격, 거기다가 마지막 랩은 정말이지 환상이다. 가사는 또 왜이리 멋져. 




Categorize me, I defy every label

And while you're selling dope, we're gonna keep selling hope

We rising up now, you gotta deal you gotta cope

Will you be electric sheep? Electric ladies, will you sleep?

Or will you pr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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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금요일 오후 두시 십분. 동생과 함께. 



- 홍상수 감독의 팬은 아니다. 그가 여태껏 만든 19편의 영화 중 겨우 7편을 보았을 뿐이기도 하고. 그의 영화에 대해 아마도 가장 공통되고 정직한 반응, 그러니까 “이런게 영화가 된단 말이야?”와 같은 놀라움 혹은 “아… 누가 나 술마시는 거 찍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하는 스노비시한 부끄러움을 순수히 즐기기에는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찌질한” 남자들의 모습, 정확히는 그들이 단지 남성 인텔리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부여받는 명백한 우위, 선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여자들을 술자리 안주처럼 대하는 모습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 선희>에서 추천서를 써주는 ‘교수’와 추천서가 간절한 ‘학생’ 간의 권력관계란 얼마나 자명한가… 교수 및 그 주변의 남자들이 결국 선희를 놓쳐버리는 결말과는 별개로 설정 자체가 불편한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최근의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도 늘 여자에게 구애하는 영화 속 남자들의 모습이 현실과 영화의 경계에 걸쳐있는건 아닐까 내심 의문을 품어왔던 입장에서 이 영화를 영화 자체로 온전히 바라본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비 내리는 금요일 오후, 동네 영화관의 가장 작은 상영관에 입장했다. 


- 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흥미로웠고 볼 만했다. 여전히 홍상수의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생경한 영화적 경험, 이를테면 촌스럽고 뜬금없지만 내가 영화를 보고있구나, 하고 느끼게끔 하는 카메라의 줌인과 뚝뚝 끊기는 이야기, 느닷없이 주인공을 불러세우는 낯선 사람의 존재 같은 것들. 특히 1부와 2부의 연결은 그냥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 영화는 홍상수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인물의 감정이나 정서적 측면이 꽤 또렷하게 그려진다고 느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역시 감독과 배우의 자기 변명이라는 동기 혹은 상황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밖에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갖는 미세한 진동을 포착하는 각본의 힘, 그리고 자신의 온몸으로 그것을 증폭해내는 김민희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부의 공원, 갑자기 그 긴 기럭지를 풀썩 접어서 절하는 뒷모습의 뜻모를 절실함. 2부가 시작하는 순간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울 듯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는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강릉의 커피샵 앞에서 영희가 담배를 피우면서 말하듯 노래하는 바로 그 장면. 샛노란 벽 앞에 검은 옷을 입고 서 있는것만으로도 하나의 그림이 되는 김민희의 메마르고 나른하고 처연한 분위기. 바람이 흐뜨러트리고 뒤흔드는 것은 담배 연기와 머리카락과 한숨이 섞여있는 외로움의 토로, 그리고 스크린 속 영희와 현실의 김민희를 동시에 마주하게 되는 관객의 복잡미묘한 감정이다.  



- 텍스트적(?)으로 영화를 분석해보자면(홍상수 영화에 그런 분석은 결코 유효하지 않을 뿐더러 부적절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 "Carried away"라는 표현으로 요약되는 영화가 아닐까. 감정에 완전히 휩쓸린 혹은 감동받은, 정도로 번역되는 이 표현. 잘생긴 남자는 만나볼 만큼 다 만나봤다는 (부럽다 부러워) 영희는 사회적으로 용인받지 못하는 감정에 carried away 되어버린 댓가를 치루는 중이다. (이 영화를 보고 불륜을 네이버 사전으로 찾아보았다. 혼인 외 애정 관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자 그대로 윤리가 아닌, unethical에 유사한 뜻인걸 알고 당황) 유부남 감독과의 스캔들로 일도 끊기고 사랑하던 이와도 이별하고 낯선 곳을 방황하면서 근근한 삶을 이어나가는 그녀. 더 웃긴건 어떤 정체모를 남자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있던 영희를 들쳐업고 아예 화면 밖으로 걸어나가는 1부의 엔딩이다. Literally, she was carried away. 


그 남자의 정체가 무엇일지 추측하는 작업은 좀 우습지만, 나는 그 남자가 이미 한차례 요란했던 사랑에 대한 영희의 조바심, 기다림, 미련과 기대 같은 감정들의 현현으로 보였다.  (써놓고 보니 순전히 내 감정의 투영이다) 1부 초반, 하릴없이 공원을 거니는 영희와 언니에게 뜬금없이 지금 시간이 몇시냐고 멀리서 소리쳐 묻는 남자는 영희를 들쳐메고 사라지는 남자 또 2부에서 유리창을 닦는 남자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시간을 따지는 질문은, 홍상수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근본적으로 무용한 질문이다. 이 영화의 시간성은 역시 홍상수 영화답게 뒤틀려있는데, 아닌게 아니라 영희와 언니는 거리와 공원을 배회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야채스프를 먹는데에는 실패하며 피아노 악보도 사고 연주도 듣고 초대 받은 곳에 가서 식사를 한 뒤 (언니와 달리 영희는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다시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해변에 나들이까지 가는데 (쓰는것만으로도 힘드네 헉헉) 이 모든 일을 단 하루만에 해낸다! 도통 때를 짐작할 수 없는 어둑한 빛과 축축한 공기가 무한정 이어지는 영화 속 시간. 이 세계에서 영희와 언니를 쫓아와 지금이 몇 시냐고 물어보는 남자는 근본적으로 이 세계의 흐름에서 비껴나있는 외부인이며, 이는 영희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계의 대상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세계에 균열을 내줄지도 모르는 반가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1부에서 이들이 보내는 시간을 짐작케하는 드문 단서 중 하나는 토요일에 감독이 올지도 모른다는 잠깐의 대화이다. 모래사장에 그 감독의 얼굴을 그려보는 영희는 분침과 시침이 정직하게 제 갈길을 가는 현실의 시간을 묻는 이 정체 모를 남자를 통해 도통 해가 저물지 않는 이상한 날들을 끊어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시간이 무사히 흘러 토요일이 되고 밤비행기를 타고 온다던 그가 영희에게 올지도 모르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원에서의 영희는 언니와 함께 그 남자를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저 사람 우리 계속 쫓아오네, 빨리 가자, 이상한 사람이야) 사실은 내심 그 남자, 그 기다림, 그 조바심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었던게 아닐까. 해변에서 아주 잠깐 홀로 남겨진 순간, 그녀는 눈깜짝할 새에, 아무런 반항없이 얌전하게 그 남자에게 carried away 되어버린다. 




- 그렇게 끝나버리는 1부를 뒤로하고 시작되는 2부는 극장에 혼자 앉아있는 영희의 얼굴로 시작한다. 1부는 영희가 지금 막 본 영화일까? 아니면 영희는 영화를 보면서 1부를 회상한걸까? 아니면 이 둘은 그냥 아무런 관계 없는 별개의 이야기인가? 명확한 것은 여전히 없다. 영희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해보이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녀는 독일에서처럼 그녀를 살뜰하게 아끼고 돌봐줄 언니를 기다리면서 그녀의 근황에 대한 호기심과 그녀에 대한 염려를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들과의 시간을 버텨내지만 영희가 기다리는 사람이 과연 그 언니 뿐일까? 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지낼 곳을 마련한 영희 앞에 왜 그 남자는 다시 나타나서 창문을 닦을까? 이번에는 누구도 그 남자를 보지 못한다. 아니, 영희는 그 남자가 보일지도 모르지만 쨌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영화가 진행되더라도 감정과 시간과 질문은 해소되기는 커녕 제자리를 맴돌며 그 부피를 점점 늘려나간다. 


- 일행을 돌려보내고 해변으로 나아가 혼자가 된 영희. 해는 여전히 중천에 떠있고 영희는 아직도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되지 못했다. 바람부는 겨울바다의 백사장에 누워있는 영희를 일으키는 건 일어나서 불을 쬐자는 누군가의 목소리이며,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를 그 감독에게 데리고 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독과 영희의 대면. 영희는 감독에게 후회하냐고 쏘아붙이고 감독은 그런 영희 앞에서 변명하다가, 징징대다가 끝내는 영희를 위해 책을 읽어주겠노라며 폼을 잡는다. 곱게 보기 어려운 감독의 주절거림과 자기 연민이 지겹다고 느낄때 쯤 영희도 담배를 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화면은 백사장에 누워있는 영희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마침내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되려던 참이었는데,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낮의 해변에 머물러 있는 영희. 그녀는 그렇게 꿈에서라도 그 감독을 만나고 싶었던걸까. 그런 재회는 그녀가 기다렸던 재회였을까. 아니면 그저 꿈이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기를 바랬던걸까. 밤이 되면 다시 꿈을 꿀 수 있을까. 어찌됐든 모래 사장에 옆으로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은 애잔하다. (<경주>에서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며 왕릉 위에 눕는 신민아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 장면도 참 아름다웠는데, 팔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모로 누워있는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뭔가 짠한걸까.) 


"일어나세요. 정말 큰일날뻔 하셨어요." 그녀는 누군가의 선의를 딛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약간 아래쪽에서 잡는는 김민희의 가녀린 몸과 파리한 얼굴, 그리고 그녀를 때리는 바닷바람의 생생한 질감. 영희는 해변을 천천히 걷기 시작하고, 그녀의 실루엣이 화면에서 점차 멀어지며 영화가 끝난다. 질문은 계속된다. 영희는 여전히 그 곳에서 서성대며 밤을 기다릴까?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희의 그리고 김민희의 다음이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화 속 사람들은 영희에게 끊임없이 칭찬을 해준다. 넌 너무 이뻐. 너 성숙해졌다. 너 매력있어. 너 똑똑해. 너 생각보다 영어 잘해, 라는 칭찬까지. 영희에게 무한정 쏟아지는 우쭈쭈는 사실 민망한데도 없지 않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이만큼이나 여성의 자리를 단단히 마련해준 적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해보면 나름 의의가 있다. 이성의 구애나 권위에의 선망이 아닌 순수한 보살핌과 격려가 잠깐씩 내비쳐지는 순간들. ("민희야 감독들은 널 사랑한다"가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준희와 영희와의 키스신. 나만 좋았던 건 아니지? 송선미는 김민희보다 키가 크더라. 그리고 여전히 이쁘고 날씬해 흑흑. 거창한 의미 부여 없이 여자랑은 한번도 안해봤지만 바로 옆에 이쁘고 좋은 언니가 마침 앉아있으니 해보는 키스. 누구에게나 무해하고 또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아서 더 멋지지 않나. <아가씨>에서의 히데코와 숙희의 마지막 섹스보다 두근거렸다. 


**좀더 까칠하게 보자면 어쨌든 홍상수는 자기 변명을 솜씨좋게 늘어놓을 수 있는 수단을, 그것도 꽤 근사하고 탄탄히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자본과 재능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전세계의 시네필들까지. 그는 김민희라는 훌륭하고 귀한 재료 없이도 여지껏 자기 세계를 잘 구축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문성근이 객기 부리는 장면이 좀 많이 짜증났는데, 그건 그정도로 펼쳐보이는 노골적인 자기합리화마저도 그가 여지껏 일관적으로 견지해온 나름의 미덕인 솔직함이라는 틀에 쉽게 용해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정재영과 그의 파트너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이라니. ("그 여자랑 살고나서 폭삭 늙었어!") 조강지처에 대한 본격 디스 아닌가. 아무리 댓글창이 욕으로 뒤덮인다해도 그는 자신에게 편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의 소유자이다.     


***스타로서의 김민희가 갖는 매력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좋아했던 1인으로서 (쎄씨니 에꼴이니 하는 잡지들의 페이지를 김민희와 배두나와 신민아가 휩쓸던 때가 있었지 후후) 얼굴값 할만한 남자들하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헉 소리나는 메이크업이랑 패션 화보 찍고, 세상에서 가장 시크한 결혼식 하객인... 그런 김민희의 모습으로 돌아와줬으면. 그래서 외친다. 언니! 매니시 룩 진짜 좋아하는데 홍감독 자켓말고 다른 걸로 입으면 안될까요!


****영화를 다 보고 저녁을 먹기 위해 동생과 함께 비가 그친 공원을 가로질렀다. 풍경이 딱 영화 속 함부르크 같아서 "보이시나요 저의 마음이-"를 흥얼거렸고, 무슨 질문에도 답은 "I was very hungry"를 세 번씩 반복해야 한다며 낄낄거렸다. 한 시간 정도 걸은 덕택에 우리는 실제로 무척 배가 고파졌고, 그래서 맛있게 쌀국수를 먹었으며 다시 집까지 한 시간을 걸었다. 어찌보면 영희처럼 보낸 하루였던 셈. 다만 절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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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토요일 세시 사십분. 



- 상영관에 입장할 때 직원들이 비닐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포스터를 나눠주고 있었다. (영화 수입사 측에서 특별히 진행한 이벤트라고.) 처치 곤란하니 안 받아야지 하고 있었는데 앞에 먼저 가던 J가 그냥 두 장을 다 받았다. 자리에 앉고 포스터를 대충 말아 가방에 넣으며 이런거 방 벽에 붙여본지 십년도 더 된거 같아, 라고 하는 순간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 영화가 시작하는 방식. 자신의 구역을 점검 나온 마약 판매상 후안의 시점을 따라 카메라는 커트 없이 주변을 훑는다. 마약을 팔고 사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빙글빙글 돌며 스케치하고, 긴 호흡의 이 장면은 후안의 앞을 뛰어가는 작고 마른 아이, 그리고 그를 쫓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비추는데까지 이어진다. 약간 기울어있는 오후의 햇빛, 층고가 낮은 남루한 집들과 오래된 자동차들이 띄엄띄엄 늘어선 길, 그 곳에 모여있는 중독자와 판매자와 관리자, 그들 간에 오가는 슬랭과 웅얼거림이 섞인 말들, 그리고 화면 한 쪽에서 다급히 뛰어와 다시 반대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아이와 아이들. 이 오프닝은 나른함과 긴장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영화속 세계로 보는 이를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라서 그런지, 마치 Act가 나눠진것처럼 영화는 주인공 샤이론의 이야기를 세 파트로 나눈다. 그리고 이 파트는 각각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이름을 갖는데 이는 어린이, 청소년, 성년시기를 거치는 샤이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각각 소년, 퀴어, 흑인이라는 세 축을 영화와 인물의 중심에 심는다. 왜소한 아이로서 리틀의 시기를 보내는 샤이론은 부재하는 아버지와 마약 문제를 겪는 어머니 대신 유사부모가 되어주는 후안과 테레사의 다정함을 통해 생존한다. (후안의 등장이 1부에 한정되어 있는 것도 그 이유 아닐까.) faggot이 뭐냐고, 또 자신이 게이인지를 어떻게 아냐고 묻던 아이는 2부가 되면 어느새 팔다리만 기다랗게 자란 깡마른 틴에이저가 되어있다. 여전히 그는 어린 시절처럼 괴롭힘을 당하고 엄마의 마약 중독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있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서서히 깨닫는다. 


- 사실 3부가 시작되면서 나는 약간 당황했는데, 그 이유는 샤이론이 1, 2부 시절의 호리호리함을 뒤로하고 멧돼지도 때려잡을 것 같은 근육질 남성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 샤이론은 놀라운 연기로 아이 샤이론의 얼굴을 불러낸다!) 이처럼 리틀과 블랙 간에는 외양이 크게 달라질만큼이나 긴 시간이 놓여있지만, 영화는 그 시간을 다시 되돌려 수평선 위에 뜬 달빛과 바다를 마주서고 푸르게 빛나는 어린 샤이론의 뒤돌아보는 얼굴로 돌아가 엔딩을 맺는다. 고개를 돌려 마치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 같은 이 때의 샤이론은 그전까지 영화에서 보여줬던 어떤 얼굴보다 가장 힘있는 눈빛을 전달하는데, 이 때 이 응시와 엔딩에 서려있는 힘은 앞서 언급한 도입부의 독특한 카메라 워크를 포함하여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리듬 혹은 각도가 만들어낸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운 섬세함의 축적에 기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서사적으로 가장 도드라지는 전환점이자 미학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2부, 밤의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케빈과 샤이론이 대화를 나누다 서로를 만지게 되는 신이다. 이 신에서 카메라는 내내 묘한 각도와 신중한 거리감을 체현한다. 옆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소년들의 얼굴은 정면 혹은 옆모습의 숏을 교차시키면서 보여지는 대신 약간 떨어진 대각선 방향에서 차분한 호흡으로 담긴다. 이러한 각도는 서로의 호기로움을 내세우다가 뺨에 스치는 바람의 촉감, 그리고 그 촉감이 불러일으키는 슬픔과 외로움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소년들의 내밀한 대화에 조용히 관객의 자리를 마련한다. 나아가 이 정갈한 "비스듬함"은 이어지는 키스와 터치의 뒷모습을 담아내는 화면에서 이어진다. 옆으로 맞닿아있는 깡마른 등줄기, 떨리는 몸을 버티고 있는 기다란 팔, 뾰족하게 치솟은 어깨는 서로를 마주보지 않은 채 소극적으로 얽혀있는 케빈과 샤이론을 비추는 화면에 선과 모서리들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이렇게 인물들 간의 시선, 또 관객이 인물들을 바라보는 화면을 엄정하게 통제하고 절제하는 방식으로 마지막 장면의 응집력을 쌓아올린다. 


- 한편 영화 엔딩에서의 인상적인 응시는 영화 내내 다른 인물들과 눈을 좀처럼 마주치지 않는 샤이론이 스크린 밖 관객의 눈과 적극적으로 마주하는 유일한 순간이자, 전형적인 "성장" 서사에 편리하게 기대지 않는 영화의 미덕을 함께 드러낸다. 샤이론은 워낙에 내성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영화 또한 턱을 떨어뜨리지 않는 그의 얼굴을 좀처럼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체로 긴 속눈썹을 무겁게 내리깔고 있는 그의 눈을 관객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장면은 그가 거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때 정도로 한정된다. 먹을 때도 걸을 때도 늘 구부정한 어깨에 푹 수그린 고개, 한 번에 두 세마디 이상을 좀처럼 내뱉지 않는 과묵한 그. 그런 샤이론에게 있어 케빈은 잔디밭, 학교 비상 계단, 그리고 밤바다에 홀로 떨어져나온 그의 뒤에서 불쑥 나타나 말을 거는 존재이다. 따라서 샤이론이 케빈을 먼저 발견하는 행위,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하는 고갯짓은 그가 퀴어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온전한 자기 인정과 고백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예비한다. 애틀란타에서 고향 마이애미로 돌아가 케빈이 일하는 식당에 들어간 샤이론은 바에 앉아서 자신의 등뒤에서 손님들 사이를 오가는 케빈의 움직임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테이블만큼의 간격 그리고 와인의 알딸딸함을 빌려 마주앉은 케빈과 점차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케빈의 집에 이른 샤이론은 십여년 전 그들이 함께 호흡했던 바람과 파도소리를 느끼고, 마침내 "나를 만져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라는 말을 토해낸다. 자신을 만져주고 또 자신이 만졌던 단 한사람을 마주한 채 영화의 마지막 말을 내뱉는 샤이론의 이 모습이 울컥한 이유는 이 순간을 위해 샤이론이 돌아와야 했던 길이 그만큼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케빈에 대한 사랑의 고백보다는, 단 한번 뿐이었던 최초의 몸짓이 그 바닷가에 정말로 있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의 절박한 혼잣말에 가깝다. 무엇이 될지, 자신의 정체는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후안의 조언이 리틀이 블랙이 될만큼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샤이론은 그제서야 눈을 내리깔던 어린 소년의 그림자를 벗고 그를 억압하던 세상의 시선 또 관객의 눈을 바라보는 존재로 자라게 된다. 


- 책상 앞 창문에 극장에서 받은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나는 어제 저녁 책상에 앉아 영화에 대해 멍하니 곱씹다가 실은 포스터 속 얼굴이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얼굴을 한데 모아둔 것임을 알아채고 그 간결하고 아름다운 아트웍에 감탄했다. (그 전까지는 얼굴을 가르는 세 가지 빛깔이 그저 인스타 프렌들리하게 덧댄 디자인이겠거니 했었다...) 그리고 이 감상문은 사실 그 세 얼굴을 한참동안 발견하지 못한 나의 둔감함을 조금이나마 정당화하고 싶어서 쓰여졌다. 영화의 마지막 눈빛에 취해서 코 위의 상처와 수염난 강인한 턱을 보지 못한거라는 변명. 그에게 가해진 의미없는 폭력과 부당한 고통의 증거, 자신의 진짜 얼굴을 감추고자 하는 시도들은 이제 세상을 마주보는 샤이론의 크고 아름답고 슬픈 눈, 그리고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검은 피부의 존재감에 가리워진다. 





*세 배우의 다른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한 인물임을 납득하게 만드는 이 눈빛! 감독의 연기 디렉팅이 대단하니까 가능했겠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소동 덕분에 좀 찝찝하기는 하지만, 트럼프 시대를 막 열어제낀 이 시점에서 이 영화가 작품상을 탄 것 또한 여러모로 재밌는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할리우드의 선전포고라고 해야할까. 선빵을 치기에는 영화가 다소 유순한 정조를 띄고 있다는게 아쉽지만 어쨌든 이 영화의 선전 덕분에 이런 신선한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힘과 지지를 받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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