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없는 나날>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스러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 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고

울 수 없어 노래하는


지상에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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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언젠가 우리는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르는 채. 각자의 손에 각자의 팝콘과 콜라를 들고. 이제 어두운 실내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채. 의자를 찾아서 두리번 거리지. 각자의 연인에게 보호받으며. 동공을 크게 열고, 숨을 잠깐 멈추고. 우리는 함께 영화를 볼 것이다. 우리가 함께 본 적이 있는. 어둠 속에서 사건들은 빛나고. 얼굴의 그늘을 밝히고. 우리가 잊힌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팝콘 한 움큼 쥐려다 서로의 팝콘 통을 잘못 뒤적거리고. 손이 엇갈릴 수도 있겠지. 영화가 뭘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는 채. 깊이 없는 어둠으로부터.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 한 손에 빈 콜라병을 들고서



-------------


영화가 끝난 뒤 환해지는 조명. 저 앞 스크린에 가닿던 빛과 그림자가 모두 걷히고 난 뒤 남는 것은 오직 텅 빈 극장. 너와 나는 서로를 모른채, 각자의 연인도 없이 그 내부를 홀로 바라본다. 두리번거리며, 눈을 깜빡이며, 빈 콜라병이 손에 쥐어져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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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다시 태어나다


*

내 존재의 만족스런 부분만 기록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어쨌거나 그런 일도 거의 없지 않은가!) 오늘의 구역질 나는 낭비를 남김없이 기록하자. 스스로에게 느슨해져 내 미래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21쪽)


*
이제부터 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건 아무리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라도 뭐든지 다 쓸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고급문화만 섭취한 데서 오는 일종의 바보 같은 자만심.
입은 설사병. 타자기는 변비에 걸렸다.

형편없어도 상관없다.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쓰는 것뿐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충분히 좋지 않다는 변명. (25-6쪽)


*

일기를 쓰는 것.

일기를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생각들을 담는 용기- 속을 터놓을 수 있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 문맹인 친구처럼 -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나는 그저 일기에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게 나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자신을 창조한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아아,)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많은 경우 - 그 대안을 제시한다. (213쪽)


*

글쓰기가 왜 중요한가? 주된 이유는 이기주의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작가라는 페르소나를 갖고 싶기 때문이지, 해야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게 뭔가? 약간의 자부심- 이 일기가 기정사실화 하듯 -을 쌓아 올리면, 내게는 말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자신감에도 도달하게 될 것이다. (214쪽)



--------


수전 손택의 일기장도 별 거 없구나, 싶어서 더욱 좋았던 책. 그녀는 과연 자신의 사후에 이런 내밀한 속살까지 출간될 줄 알았을까? 

군데군데 적어둔 구절, 또 재밌는 부분도 다양했다. 윗 내용같은, 글 쓰는 이로서 필연적으로 갖는 원초적인 고민들부터, 핸드폰 생산성 관리 어플에 적어둘 법한 일상의 기록들까지. 이런 책을 읽는 기분이란, 뭐랄까, 누군가가 흘려두고 간 외투나 목도리 같은 것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면서 그 주인을 상상하는 일 같다. (변태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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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즐거움>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투사지 위에 씌어진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 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 아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고요" -- 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구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선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눈 깜빡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 고리를 동여매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


쓰는 행위, 그리고 이를 통해 써지는 것들과 구축되는 세계에 대한 글쓴이의 완벽한 지배,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즐거움이라...

나같은 옹알이는 도통 알 리 없는 거장의 희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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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난간에서>


누가 슬픔의 별 아래 태어났으며

누가 슬픔의 별 아래 묻혔는가

이 바람 휘황한 고지에서 보면

태어남도 묻힘도 이미 슬픔은 아니다


이 허약한 난간에 기대어

이 허약한 삶의 규율들에 기대어

내가 뛰어내리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내가 뛰어내려야만 하는

이 삶의 높이란



--------


삶도 죽음도 더 이상 슬프지 않을 때가 되어서 시인은 고지에 오른다.

하지만 그 높은 곳에서, 비록 허약할지라도, 난간과 삶의 규율은 화자를 붙들고 있고.

뛰어내릴 높이를 가늠하는 자는 결코 발을 떼지 못하리라.


때로는 읽기가 힘들만큼 격렬한 자해가 남긴 흉터 같은 시인의 시가 여전히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는 결국 상처가 아문 자국으로서의 흉터 그 자체가 삶을 증거하기 때문이겠지. 가난하고 외롭고 불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은 그녀의 신화 같은 삶, 그 삶의 불꽃이 피워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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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계절감>


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땀을 흘리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을 흘리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



개는 어쩔 수 없이 가죽을 벗지 못하고 나는 어찌하지 않으려 외투를 벗지 않는다.


모퉁이에 기댐으로써 기다림을 가리고 주머니 속 영수증의 날짜가 그닥 오래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뒷맛이 쓴 위안, 금새 숙성된 미련. 


껍질을, 허물을 벗는 변태의 순간은 얼마나 요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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