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새>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주 우울한 기분으로

오늘 저녁의 창밖으로 날려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웃었을 것이다.

깔깔깔.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서로의 영혼을 동그란 돌처럼 가지고 논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에는 그토록 진저리치면서.


사랑이 끝나면, 끝나면 너의 손은 흠뻑 젖을 것이다.

방금 태어나 한 줌의 영혼도 깃들지 않은 아기의 살결처럼.

나는 너의 손을 움켜잡는다. 나는 느낀다.

너의 손이 내 손안에서 조금씩 야위어가는 것을.

마치 우리가 한 번도 키우지 않았던 그 자그마한 새처럼.


너는 날아갈 것이다.

날아가지 마.

너는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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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깔, 하고 휘발된 웃음소리. 날아가버린 새. 부재로서 존재하는 기억들.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매일 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 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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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슬플 것 같은, 생채기 난 마음을 이렇게 때때로 들여다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까. 

가만히 방에 있어도 코가 시려운 이 계절의 유일한 장점은 눈물 대신 흐르는 콧물을 훌쩍거리는게 어색하지 않은 날들이라는 점.


떨어진 꽃들이 땅에 묻혀 거름이 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싹이 틀 걸 분명히 알면서도 지금으로선 그 때가 너무 요원하다. 영영 아플 것 같은 이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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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해주는 것, 서툴렀던 어제의 나와 그 사람에게 더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 우리는 그런 어제 때문에 많은 것을 잃고 고통을 겪고 심지어 누군가는 여기에 없는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건 우리의 체온이 어쩔 수 없이 조금 내려간, 하지만 완전히 얼지는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는 다시 돌아왔고 여전한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힘들다면 잠시 시선을 비껴서 서로를 견뎌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되돌릴 수 있다. 근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가 서로를 견디며 왜냐고 묻는 대신 대화를 텅 비운 채 최선을 다해 아주 멀어지지만은 않는다면?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형편없이 나빠지는데 좋은 사람들, 자꾸 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아지는 것은 기쁘면서도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가 괜히 마음으로 거리를 두었다가 여전한 호의를 숨기지 못해 돌아가는 것은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사랑하죠, 오늘도,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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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젊은작가상 수상집 대상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에 대한 작가노트에서 적어옴.
작년 수상집에 실렸던 <조중균의 세계>의 작가노트도 마음이 아려서 기억에 남았었는데. 

피시버거를 우물거리다가 내뱉는 "사랑하죠, 오늘도"라니 
소박하고도 무심한 그 마음과 태도가 조용하지만 오래 가는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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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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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물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몸을 적시게 된다는 사실도 함께 유념해야 한다. 물에 몸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는 없다. 몸에 묻은 물이야말로 강을 건넜다는증거이다. 당신은 몸에 물을 적심으로써만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혹시 당신은 몸에 물을 적시지 않고도 강을 건너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가령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틀린 생각이다. 그 경우에 강을 건넌 것은 비행기나 배지 당신은 아니다. 당신은 다만 비행기나 배에 타고 있었을 뿐이다. 몸으로 건너야 한다. 몸이 건너야 한다. 발이 젖고 머리가 젖고 입 속으로 물이 들어갈 때 비로소 강을 건넜다고 할 수 있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쓰기는 전혀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압축과 비약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도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물이 당신의 몸속으로 스미게 해야한다. 그 길 밖에 없다.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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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과 비약이라는 허깨비의 유혹에 빠지지말것.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시간을 몸으로 버틸 것. 깊고 넓은 강을 건너려면 온몸이 젖는 것 만으로도 때로는 부족하다는 것. 그렇기에 젖어야 하는 숙명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담대하게 마주할 것. 이것은 삶의 태도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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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4>


자신의 핏속에서만 용감하게 달리던 흑기사가 있었다

그때 아홉개 조각난 얼음에 찔린 듯

그때 뜨겁고 붉은 입속에서 찌르던 것들 사라졌다

말할 것이 많았다 말할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행동으로 환원되었다


검은 벽

검은 별과

검은 병이 뒤척이던

향기 나는 몸뚱이의 지진


그때 모든 이들은 노래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때를 향해 가수의 입술은 피어나고


우리는 지나간 허기에 대해

닫힌 대지처럼 굳게 입을 다문다



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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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처럼 차갑고 피처럼 뜨거운 감각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시간들. 무수한 말과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이것들이 형체를 찾아 분출되는 순간은 결국 일부였다.

적혀 있는대로, 당시의 허기는 이제 지나간 것이 되었고, 그때에도 말해지지 않은 것, 행동으로 환원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내 속에 묻혀있다.

나 대신 노래해주는 시인의 입술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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